홈 > 칼럼 > 칼럼
칼럼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시기

공계진 /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이사장
금속노조연구원   |  

코로나19가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다행히도 확진세가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무서운 기세로 퍼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감소세도 불안하기 그지 없다. 이런 점을 감안, 정부당국은 적극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고하고 있다. 말이 권고지 상황은 이 권고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대구의 코로나19를 재앙수준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일단 진정을 시킨 것에 대해 세계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중국케이스(우한 봉쇄)보다는 한국케이스(대구 미봉쇄)를 모범으로 삼는 듯하다. 우리 국민들도 현 정부의 대처능력에 좋은 점수를 주고 있기도 하다. 필자도 정부의 대처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정부의 대처속에 포함되어 있는 문제점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제해결을 촉구하고, 그 문제마저도 정부가 제대로 대처한다면 그때 가서 코로나19 대처에 대해 후한점수를 줘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끄집어 내고픈’ 문제는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요사이 이를 ‘물리적 거리두기’로 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필자는 하나의 전제가 있을 경우 사회적 거리두기란 표현이 적절하다고 본다. 그 전제는 ‘사회적 연대’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들의 사회적활동 ‘멈추기’가 핵심요소이다. 다중이 모이는 장소에 가지 말고, 사람들과 만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생존과 관련된 생산 및 판매활동(노동)이라도 그러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람의 생존은 노동을 통해 보장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노동을 하고, 그 댓가로 임금을 받아(맑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정확한 표현은 아님. 임금은 노동력의 댓가) 구매활동을 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두기는 많은 이들의 노동을 막는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의 수입이 중단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미 많은 돈을 자신의 금고나 은행에 저장해 둔 사람들이야 수입이 끊겨도 그 돈을 쓰며 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하루벌어 하루살아가는 일용노동자 등 비정규노동자들은 꺼내 쓸 돈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포기하고 노동의 현장을 기웃거려야 한다. 즉,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글거리는 사회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포기하는 순서는 정해져 있다. 즉, 정확히 ‘가난한 순서’대로 포기한다. 그리고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는 순서도 정해진다. 바로 ‘가난한 순서’이다.

 

가난한 자들은 바이러스의 공격외에 사회의 공격을 받는다. 사회구성원들은 그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이렇게 외친다. “저것들이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정책을 무시하고, 바이러스를 전파시켰다.” 이것이 필자가 언급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맹점이다. 사회적 합의를 일부만 지킬 수 있게 하고 그 책임을 돈이 없어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가한다. 그래서 사회적이란 표현을 매우 부적절하게 만들어버린다.

 

필자는 앞에서 어떤 전제하에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표현의 사용은 적절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회적 연대’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또 다른 구성원이 손길을 내밀어 포기를 막아낸다면 사회적 거리두기는 유지되고 그 결과 어느 구성원의 파기로 인한 공동체 내의 균열은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거리두기는 성공하는 것이고, 그 결과 바이러스에 의한 공격은 무력해지며, 구성원들의 집합체인 사회적 공동체는 굳건해진다.

 

문제는 사회적 연대를 위한 정책을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회적 연대의 실현은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우선적으로 시행하면 이루어진다. 현재 시점에서 가난한 이들이 바이러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거리두기를 포기하는 것은 돈 때문이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데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곧 굶는 것, 더 나아가 죽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돈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재난소득이든, 기본소득이든 명칭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문재인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에 제대로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풀어야 한다. 그를 위해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고, 부자들의 기부를 유도해야 한다. 즉, 사회적 연대를 실현시키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노동조합의 역할이 정부의 역할 못지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포기하고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우글거리는 사회로 가장 먼저 나올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가난한 노동자들, 그 중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다가 회사경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해고된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심각한 것은 해고가 멈춘 것이 아니라 IMF 때의 집단적 정리해고가 준비되거나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해고된 노동자들은 해고시 받은 얼마 안되는 돈으로 버티다가 굶어죽으나, 병걸려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바이러스가 우글거리는 사회로 나올 수 밖에 없다. 앞에서 필자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포기는 ‘가난의 순서대로’라는 표현을 썼는데, 보다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배고픔의 순서대’로이다.

 

노동조합은 정부 못지 않게 이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이 문제 해결에 있어서 핵심은 노동자들간 연대이다. 연봉이 높은 노동자들은 연봉이 낮은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대공장 노동자들은 중소공장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정규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거리두기는 성공하고, 노동이 존중되는 사회적 공동체도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은 이 연대를 조직해야 한다.

 

이 연대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등을 당하지 않도록 단결투쟁을 조직하고, 이미 가난한 상태로 빠진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을 해야(지원촉구가 아님!) 한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런 시기에 십시일반으로 연대기금을 마련, 정리해고 저지투쟁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이미 살길이 막막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가칭)연대소득이란 명목으로 소득지원하는 것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이제 우리 노동자들도 남아공의 우분투가 했던 배려하기, 노동공유, 관계맺기, 주인되기 등을 일상화해가야할 때이다. 남아공 노동자들이 했던 것을 우리노동자들이 못할 이유는 없다. 더 이상 정부만 바라보며 우리의 동료들을 저버리는 것은 죄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