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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12년 노동정세를 가름한다.

금속노조연구원   |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12년 노동정세를 가름한다

 

이 남 신 노동연구원 자문위원(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2012년 2월 23일

 

마침내 비정규운동 역사상 가장 중요한 판결이 선고된 날,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뺨위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2004~5년과 2010~11년 두 차례에 걸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우여곡절 끝에 패배하고, 어처구니없게도 현대차 자본의 탄압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린 비정규지회를 보며 가슴을 쳤던 기억이 새로운데 이렇게 또 기회가 주어졌다. 아니다. 주어진 게 아니다. 이 극적인 판결은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투쟁으로부터 어언 1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투쟁해온 전국 각지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불굴의 투쟁과 헌신, 피땀어린 희생에 힘입은 것이다. 노동자들의 피값이다.

 

이 판결은 ‘묵시적 고용계약관계’를 인정하지 않아 불법파견 노동자 전체를 근속과 상관없이 직접고용으로 판정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고 아쉬움이 크지만 그럼에도 자동차산업을 위시한 조선/전자/기계/철강 등 한국 제조업에 만연한 사내하청 고용을 불법파견으로 판정했다는 점에서 환영해 마땅한 판결이다. 최병승 동지 개인에 대한 판결이 아니라 이 나라를 떠받치고 있는 제조업 현장에서 땀흘리면서 착취받아온 사내하청 노동자들 전체와 관련된 판결이기에 그 의미는 자못 역사적이다. 고용노동부의 2011년 조사에 따르면 완성차업체 2만명을 포함해 300인 이상 대기업 사내하청 규모만도 32만명에 이른다. 이들로만 한정하더라도 2년 이상 근속시 정규직화하라는 대법원 판결의 요점대로 현실이 바뀐다면 제조업 현장은 일대 지각변동이 불가피하다. 노사관계에 미칠 파장 또한 대단히 크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분할 통치와 사내하청 노동 착취를 통해 어마어마한 천문학적 초과이윤을 축적해온 대재벌 자본이 얼마나 이 판결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인지는 불문가지다. 이제 가장 중요한 관건은 비정규직-정규직 노동자들 자신이다.

2012년 2월 28일

현대차 비정규3지회 수련회가 열린 이 날 정세교육을 하러 갔다. 60여명의 현대차 비정규지회 동지들과 GM대우, 기륭전자 동지들이 함께 모였다. 사내하청 동지들 앞에선 처음으로 하는 교육이라 적이 긴장도 됐지만 동지들 앞에 선 순간 오묘한 기운이 나를 감싸는 걸 느꼈다. 참으로 편안해졌다. 준비해온 교안을 밀쳐두고 마이크를 잡고 진심을 담아 1시간 동안 토로하듯 교육했다. 서비스업 정규직 출신 해고노동자가 사내하청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 대해 보탤 말이 뭐 그리 많겠는가만 워낙 중요한 투쟁이므로 할 말은 하자, 가슴에 차오르는 말은 하자 작심하고 동지들의 눈망울을 응시하며 말씀드렸다. 하늘이 내린 이 투쟁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3지회의 힘과 마음을 하나로 잘 모으자, 살얼음 걷듯 인내하면서 정규-비정규 공동투쟁을 기필코 승리로 성사시키자, 어떤 경우든 사내하청 동지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정파 질서에 휘둘리지 말고 절대로(정말 강조했다) 조합원들을 중심에 두고 결정하고 집행하자, 노조는 쪽수가 힘이니만큼 조직화의 중요성을 가슴에 새기자, 최병승과 안기호를 가르는 판결의 한계를 투쟁으로 뛰어넘어 노동자는 하나라는 걸 보여주자, 어떤 목표든 함께 합의하고 공동책임지자, 이번만은 기필코 몰염치한 악질자본가 정몽구를 무릎꿇릴 수 있도록 단결투쟁하자. 그 날 내가 했던 말들이다.

 

처음 문경으로 갈 때만 해도 기우가 많았다. 1년이 넘도록 노조 정상화도 이루지 못한 채 비대위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울산 상황을 보면서 더욱 그랬다. 화도 좀 났다. 영웅적인 25일 점거파업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잘 갈무리하면서 비정규지회 동지들이 이번 판결을 투쟁의 기회로 다시 한 번 낚아챌 수 있을까 반신반의한 게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수련회 초입, 울산, 아산, 전주의 동지들 53명이 차례로 짧고 굵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 투쟁은 해볼 만 하다!’ 느낌이 강하게 왔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해도 되겠구나 확신이 들었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도 교육 때의 감흥이 떠올라 혼자 바보처럼 배시시 웃음짓고 있다. 참으로 간만에 느껴보는 투쟁의 진정성 가득한 기운이었다.

삼시 세판

 

잔소리 같지만 이번 현대차 사내하청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의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 ① 10여년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피어린 투쟁 끝에 쟁취한 소중한 성과로 불법파견 근절의 결정적 전기, ② 자동차/조선/전자/철강/기계 업종에 만연된 사내하청 노동에 대한 준거 틀 마련 - 최소한 2011년 기준 약 32만명에게 직접적인 영향, ③ 한국 사회 직접고용 정규직화 투쟁의 분기점, ④ 더 열악한 조건에 있는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에 승리의 영감과 자심감을 불어넣어줄 호재, ⑤ 정규-비정규 단결&원하청연대의 유리한 정세와 조건 형성의 교두보, ⑥ 민주노조운동 부활의 신호탄 : 산별노조가 산별노조답게 진일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한국 사회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민주노조가 자리잡고 있는 곳에서 대법원 최종 승소 판결을 등에 업고 정권과 자본의 탄압 속에서도 산전수전 다 겪으며 지금까지 버텨낸 사내하청비정규3지회가 조직화되어 있는 조건에서 이 투쟁을 이길 수 없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900만 비정규직 사회. 비정규직으로 취업해서 비정규직으로 퇴출되는 사회. 절반의 노동자가 심각한 차별과 고용불안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불안사회. 비정규직도 하나가 아니라 열로 스물로-계약직/임시직/기간제/파견/용역/도급/사내하청/민간위탁/호출노동/재택노동/특수고용/알바 등- 짜갈라진 사회. 무한경쟁 승자독식 신자유주의 경제구조 속에 피멍든 노동자들의 한숨과 체념이 날로 늘어만 가는 사회.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구두선이나 공문구로 그치기를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해온 사회.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비아냥과 조롱을 풀죽어 받아들이는 사회. 그 와중에 노동자의 아이들은 가난을 신분세습처럼 대물림하는 사회. 이런 모든 것이 이제 일상이 되고 있는 그런 나라. 이제 반역을 꿈꾸기만 할 게 아니라 실행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사회여론화와 정치권 쟁점화에는 지나치게 성공했지만 정작 비정규직 당사자의 현실은 개선조차 쉽지 않게 노동시장 양극화가 구조화되고 고착화된 한국 사회를 노동자의 이름으로 개변시킬 절호의 기회가 20년만의 총․대선이 있는 권력재편기인 올해다. 변치 않는 노동자 승리의 비결인 단결과 연대로 재벌 중심 경제 구조를 노동 중심 경제 구조로 뒤바꿀 천재일우의 기회가 바로 올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900만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선봉에 선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이 각별한 주목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한 채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고 있는 여성노동자들, 노동인권을 알기도 전에 가망 없는 차별과 노동착취에 미리 시들어버린 젊은 청춘들, 노동자성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일하다 죽어도 아무 보상도 못받는 특수고용 노동자들, 실업과 반실업을 반복하며 하루 벌러 하루 사는 하루살이 노동자들, 이 땅에서 천민으로 홀대받는 이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과 애환을 받아안고 그래도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 조금은 여유가 있고 싸워볼 만한 여건에 있는 사내하청 동지들이 대표선수로 나섰기 때문이다. 원치는 않았을지 몰라도 이왕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면 흔쾌하게 번쩍 어깨에 지고 노동해방의 신명난 세상을 향해 달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삼시 세판이라고 했다. 응원하고 연대하는 입장에서 이번만은 노동현장에서 차별과 홀대의 주홍글씨를 감수하며 묵묵히 감내해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지난 시기 뼈아픈 패배의 상흔을 거대한 투쟁의 파고로 일거에 씻어버릴 거라고 믿는다. 사내하청 동지들을 주축으로 한 금속노조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항쟁과 정변의 기운을 상징하는 흑룡의 해에 노동자투쟁의 역동성과 민주노조운동의 힘찬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리라 믿는다. 더 나아가 전국의 일터에서 땀흘리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봄을 알리는 전령사가 될 것으로 믿는다. 몇 번 싸워본 깜냥으로 다음 구호를 동지애를 담뿍 담아 외쳐본다. “동지를 믿고 나를 믿고 끝까지 투쟁하자!”, “불법파견 박살내고 정규직화 쟁취하자!”, “노동자는 하나다 단결투쟁 승리하고 정몽구를 무릎꿇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