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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장기불황과 노동자의 책무

금속노조연구원   |  

장기불황과 노동자의 책무

 

 

박하순(노동자운동연구소장)

 

경제, 정치 어디를 봐도 현시대는 전망이 불투명하고, 그래서 불안이 지배하는 시대로 보인다.

우선 경제를 보자. 어떤 이들은 현재 세계자본주의가 1930년대 같은 세계대공황에 빠져 있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의 재정위기, 위기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긴축정책이 위기를 더 심화시키고 있는 상황, 그리고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다른 이들은 세계자본주의가 다시 더블딥(경기 재침체)에 빠져들고, 이는 세계대공황으로 이어질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는 작년 8월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및 주가폭락 사태 그리고 더블딥 논란을 겪으면서 형성된 견해일 듯하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유럽은 여전히 불안해 보인다. 유럽중앙은행이 돈을 많이 풀어 사정이 일정하게 개선되었고, 그리스가 2차 구제금융을 받고 정부부채도 일정하게 탕감받으면서 당장 채무불이행(디폴트)에 빠질 것 같지는 않지만, 현재 지속되고 있는 긴축정책으로 인해 포르투갈이 그리스에서처럼 사태가 전개될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미국은 실업률이 아직 높고 성장세가 미약하나 구준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문제가 되었던 주택부문도 최악의 상황은 벗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사 유럽에서 문제가 일정하게 악화된다 하더라도 더블딥에 빠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중국 등 개도국의 상황은? 중국의 부동산 거품 등 문제가 없진 않지만 여전히 성장률이 상당히 높고, 외환위기 가능성은 거의 없어 여타 개도국에서 보였던 외환위기와 겹친 파국적인 위기가 전개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즉 중국의 경착륙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겠다.

그러면 왜 이런 비관적인 이야기가 여전히 계속되고 이런 이야기들이 노동자민중들에게 그럴법한 이야기로 들리는가? 우선, 거시경제 지표상의 회복 또는 일정한 건전성과는 달리 노동자 민중들의 삶이 여전히 팍팍하기 때문일 것이다. 위기 직전의 호황에서 노동자 민중들의 생활의 개선 정도는 아주 적었고, 위기극복과정에서 위기부담은 노동자민중들에게 거의 전적으로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실업과 해고위협에 시달리고 있고, 거의 정체하거나 오히려 후퇴하는 근로조건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경기회복이 세계적으로 불균등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면 매우 미약해서 장기불황이라 해도 일컬을 만한 상황에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사정이 좋지 않은 나라나 지역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대공황 상태에 있다거나 혹은 대공황으로 진입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 보인다. 즉 불균등한 회복세 속의 장기불황 또는 매우 미약한 회복이 그 원흉이라 해야겠다.

 

정치는 어떤가? 세계적으로 보면 경제위기를 경과하면서 정치세력의 교체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방향이 뚜렷하지는 않다. 단순히 위기가 도래할 당시 현직에 있던 정권이 물러나고 야당이 집권하는 경우가 다반사다(‘현직의 위기’). 당연히 집권하고 있던 정치세력이 중도좌파였으면 중도우파 정권이 집권을 하고, 집권하고 있던 정치세력이 중도우파였으면 중도좌파 정권이 집권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집권한 정치세력은 전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책을 실시한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위기극복책, 그것은 주로 노동자 민중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는 이번 위기에 그치지 않고 소련 동구권 붕괴 이후, 1990년대 이래 비교적 일관된 현상이다. ‘시소게임이라고 이름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제도정치권을 벗어나면 이집트와 중동의 민주화운동도 있고, 그리스, 스페인 등 유럽 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거리시위도 있고, 월가의 점거운동도 있고, 스페인 등지에서의 분노한 사람들운동도 있고, 한국의 희망버스 운동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런 운동들이 좌파적 대안을 가지고 전 사회를 바꿔나가는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런 운동들 또한 여전히 분노를 표출하고 방어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뿐, 적극적인 대안을 가지고 이를 관철시킬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단적으로 분노한 사람들운동이 최초로 일어났던 스페인에서는 작년 말 좌파정권이 우파정권으로 변했을 따름이다. 확실한 좌파적 대안이 없다면, ‘시소게임에 지친 민중들의 정치적 냉소주의나 일탈, 혹은 파시즘으로의 경도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시대를 이끌 뚜렷한 이념이나 철학, 혹은 문화가 등장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각자 고립 분산적으로 끼리끼리 어울리고 있을 뿐이다. 상호소통을 통해 대항 이념이나 문화가 형성이 되고 그 속에서 민중들의 주체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신경증, 공황장애 등의 증상을 보이고 있다. 반사회적인 범죄가 돌출하기도 한다.

시야를 한국으로만 좁혀보자. 한국경제가 위기를 가장 먼저 극복했다는데(지표상으로 보면 경제성장률이 전기 대비 마이너스인 것은 1개 분기뿐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많은 노동자 민중들의 생활은 별로 개선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용불안은 여전하고, 임금은 오르지 않고, 가계부채의 짐은 날이 갈수록 버거워져 이 짐을 언제 벗을 수 있는지조차 회의적이다. 한국경제도 저성장, 장기불황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정치에서도 시소현상을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신한국당의 김영삼정권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올해 벌어지고 있는 총선과 대선에서는 다시 야권 승리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그런데 새롭게 등장할 지도 모를 야권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뚜렷한 이념의 부재 속에 문화적으로 다종다양한, 서로 소통되지 않는 끼리끼리의 문화 현상 또한 동일해 보인다.

해결책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선은 사태 자체를 명확히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경제와 관련해서는 어느날 경제가 세계적으로든 국내적으로든 다시 고성장 시대로 접어들 것이라고(이명박의 약점은 바로 ‘747’이라는 사기적인 공약이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세계대공황으로 급전직하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신자유주의라고는 하지만 국가의 개입능력은 1930년대 대공황 때와는 비할 바 없이 정책적으로든 제도적으로든 진화해 왔고, 중국 등 신흥개도국이 세계경제를 약간이나마 떠받치는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불균등하나마 지지부진한 장기불황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것을 확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세계 대다수 민중들이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대안적 이념이 어느날 갑자기, 아니면 기성의 형태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금물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투명한 전망과 불안을 걷어내고 어떻게 상황을 개선시키고 변혁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한 두차례의 큰 투쟁(노동자 민중들 내부의 격차 확대, 고립분산적인 문화, 확실한 대안 부재 속에서 이를 조직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는가)으로 이 어려운 상황이 쉬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크고 작은 투쟁을 끈질기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 이와 연관되지만 싸움 과정에서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활용할 수 있는 여지는 남김없이 활용하고, 어느 지점에서 가장 용이하게 체제를 한 발자욱이라도 넘어설 수 있는지 명확히 밝혀내고 이를 투쟁대오들이 공유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끈질긴 투쟁과, 부분적으로 체제를 넘는 투쟁 과정에서 새로운 이념이나 체제적 대안을 형성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런 체제적 대안을 관철할 수 있기 위한 커다란 운동이 가능하려면 노동자 민중들의 연대를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민중들의 저력을 튼튼히 쌓아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 민중운동은 이런 과제를 감당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우선은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을 지혜롭게 치러야겠지만, 새롭게 등장할 정권이 여전이 과거와 유사한 정책으로 일관하지 않도록 강제해 내기 위해서라도 선거에 모든 것을 걸고 넋 놓고 앉아 있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