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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012년의 노동운동과 '2013년 이후'

금속노조연구원   |  

2012년의 노동운동과 ‘2013년 이후’

 
 
임영일(한국노동운동연구소 소장)
 
1. 2012년의 노동현장
 
노동 현장이 요동을 친다. MB정권의 지난 수년 사이에, 그리고 특히 최근 1-2년 사이에 노동 현장의 상황이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물론 더 힘들고 더 어려운 쪽으로. 자본과 권력의 공세가 집요하게 집중된 금속노조의 현장은 더 그래 보인다. 복수노조 시행 불과 1년여 만에 금속노조의 현장 교두보 역할을 해온 여러 조직들이 무너졌는데, 그 중에서도 최근 ‘만도’의 조직 붕괴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금속만이 아니라 공공 등 다른 사업장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지만, 금속의 경우 재벌 자본을 중심으로 매우 계획적이고 매우 집요한 기획 공격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2006년 대기업노조들의 산별전환으로 15만 금속 대산별이 출범하자, 강한 위기의식을 갖게 된 자본과 권력의 체계적인 공세도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 조직의 지역지부로의 전환, 중앙교섭 참가, 비정규조직과 결합 등 금속노조의 핵심 방침들이 거듭 된 실패는, 물론 주체의 책임 문제가 크지만, 그 뒤에 자본과 권력의 집요한 방해 책동이 있었던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금속노조는 결국 산별노조의 틀 안에서도 대기업/중소·영세·비정규의 분할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동안 선도적으로 금속노조의 산별운동을 주도해온 주요 거점 조직들에 대한 자본과 권력의 파괴 작업도 이를 배경으로 진행되었다. 대기업 조직의 엄호와 연대가 없는 속에서 순차적으로 공격의 대상이 된 중소사업장 조직들이 힘들게 버티다가 무너져 간 것이다. ‘복수노조’ 제도는 원래 그것이 노동 측의 요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본 측의 노조파괴 전략을 한층 수월하게 해주는 장치가 되어버렸다.
 
자본의 준비된 공세가 시작되고, 노조가 여기에 저항하여 투쟁을 전개하면, 자본이 사주하거나 후원하는 ‘제2노조’가 조직되고, 직장폐쇄-폭력배 동원 등 본격적 탄압이 이루어지면서 조합원 이탈과 ‘제2노조’로의 이동을 통해 기존 조직을 무력화시킨다. 자본의 엄호 속에서 다수파가 된 ‘제2노조’는 기업별 회사노조(company union)로 존속한다. 이미 전국 수백 개의 사업장에서 진행된 이 노조파괴, 특히 산별노조 조직파괴의 공세는 과거 일본 노동운동의 경험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지금 전국의 노동 현장은 자본과 권력이 주도하는 일방적인 계급전쟁(class war)의 전장이 되어 있다. 그 목표는 분명하다. 노동조합 조직을 재분할하여 기업별로 개별 자본에게 종속된 ‘종업원 조직’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2. ‘1987년 노동체제’의 마감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대응은 매우 무력하다. 연대의 틀이 무너진 탓이다. 자본은 지금 전쟁을 진행 중인데, 노동은 전쟁은커녕 전투조직조차도 꾸리지 못하는 형국이다. 지휘부도 없고, 따라서 작전도 없다. 주력부대의 기동을 기대하고 ‘일정’을 짜보기도 하지만, 자본은 바로 그 일정에 맞추어 주력부대를 무력화시킨다. 필요하다면 매수해버린다. 자원은 충분하다. IMF 이후 15년, MB 정권 5년 동안 한국의 자본, 재벌 대자본은 몸집을 불릴 만큼 불리고 창고를 채울 만큼 채웠다.
 
노동자와 노동운동에 있어 연대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연대가 약화되면 분열이 시작된다. 연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투항을 준비한다. 버티다 무너진 조직은 되살릴 수 있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한 조직은 회복하기 힘들다. ‘만도’가 충격적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노조를 파괴한 경영자들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살짝 찌르니 푹 들어갔다,” “훅 부니까 확 날아갔다”(조건준, [매일노동뉴스], 8/27).
 
대중조직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대중운동이 정치적 엄호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 시기에,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노동정치, 진보정치는 내파(內破)되어 무너지고 있다. 가장 높은 수준의 가치연대 조직이어야 할 진보정당이 실상은 하시라도 상대방을 찌를 치명적 무기를 내장한 ‘적들의 동침’ 조직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2008년에 이어 다시 찢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1997년의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한국의 ‘1987년 노동체제’는 해체되고 ‘시장자유주의 노동체제’가 들어섰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다소 생각이 달랐다. 그동안 자본과 권력은 맹렬하게 시장주의로의 길,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1987년 이래 민주노조운동 세력이 주도한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에 맞서 격렬히 저항했다. 그 저항은 노동운동이 주체적으로 설정한 두 개의 전략적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가 곧 그것이다.
 
하지만 이제 2012년에 이르러 이 두 개의 전략적 프로젝트가 실패의 위기에 직면했음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산별노조 건설운동은 그 두 축인 공공과 금속 모두에서 좌초 위기에 처해 있고, 정치세력화 프로젝트도 거의 파산 상태에 처했다. 만일 이 두 프로젝트의 좌초가 오로지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의 억압, 탄압에 의한 것이었다면 ‘실패’라는 단어는 유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노동운동 내부에 주요한, 어쩌면 더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면 ‘실패’라는 규정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5년에 걸친 노동운동의 저항과 전략적 대안 모색의 실패, 그것은 ‘1987년 노동체제’의 최종적 해체와 시장자유주의적 노동체제의 전면화를 뜻한다. 이미 ‘시장의 쓴맛’을 단단히 보고 있는 판에 더 달라질 게 무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휩쓸고 있는 지역과 나라들 중, 그래도 우리는 노동운동, 진보운동의 저항에 의해 ‘아직 잃지 않은’ 많은 중요한 것들이 남아 있다. 의료, 교육, 금융, 철도·항만·공항·도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공기업 등과 산·강·바다·섬 등의 국토에 이르기까지, 아직 덜 잃었거나 조금만 잃은 것들, 노동운동에게는 그것을 지켜야 할 충분한 이유와 요구가 아직 있다.
 
그러나 이제 원하든 아니든 노동운동 스스로가 ‘1987년 노동체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다. 이미 여러 해에 걸쳐 노동운동의 위기와 혁신 과제의 시급함에 대해 토론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노동운동은 혁신을 방기하고 1987년 이후의 관성을 유지했다. 2012년 지금, 우리는 그 결과를 실물로 확인하고 있는 중인 셈이다. 그래도 과거의 방식을 고집한다면 미래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 2013년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다.
 
3. 자유주의 정치담론에서 벗어나기
 
2011-12년의 정세를 주도해온 진보진영의 지배 담론은 소위 ‘2013년체제론’이었다.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세력이 크게 연합하여 ‘반MB’ 혹은 ‘반한나라당’의 큰 전선을 형성해서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자, 그럼으로써 MB정권에서 망가진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자는 것이 그 내용이다. 2011년 서울시장 선거를 계기로 여기에 ‘보편적 복지’ 확대의 과제가 추가되었다. 이 정치연합의 중심은 민주당이고 여기에 비민주당 자유주의 세력(‘친노’, 참여당, 시민운동)이 결합하고, 노동운동의 경우 두 대중조직(한국/민주노총)과 두 정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 모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11년 내내 노동운동 진영 전체를 뒤흔들었던 ‘진보정당 통합론’도 결국 이 ‘2013년체제론’의 하위담론이었다. 이를 비판·반대하고 저항 세력 혹은 그룹들은 정치적 ‘꼴통’으로 몰려 구석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총선과 그 이후, 이번에는 ‘2013년체제론’ 프로젝트가 일거에 위기에 처했다. 민주통합당의 지도부가 교체되고, 통합진보당은 졸지에 터진 ‘경기동부 사건’으로 내전 상태에 빠졌으며, 한국노총도 조직 내분과 위원장 사퇴의 홍역을 치루고 있고, 민주노총 역시 대중적 신뢰와 지도력이 바닥에 떨어졌다. 노동운동 활동가들, 진보정당 활동가들의 다수가 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 진보정치운동이 이 허황한 자유주의자들의 정치담론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었던 사이에, 한국의 자본은, 그리고 모두 ‘죽은 개’ 취급을 했던 MB 정권은, 노동운동의 저변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이 이 담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한, 이후 노동정치, 혹은 노동중심의 진보정치를 다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 방법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2013년체제’의 몇 가지 목표들은 대선 승리 여부와 상관없이 어떻든 이루어질 것이다. 대선에서 새누리가 이겨도 그들의 이해관계 때문에라도 남북관계는 개선되어야 하고 사회복지도 늘려야 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노동자들의 요구는 자유주의 세력이 승리해도 이루어지지 힘들 것이다. 법제도 개선은 어차피 불가능할 것이고, 자유주의자도 구조조정은 해야 하고 노동시장은 더 유연해야 하고 기업경쟁력은 더 커져야 하고 경제는 성장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불황의 여파가 닥치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고.
 
지금 실제로 노동자와 민중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의 정치연합은 자본+보수+자유의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이다. 이 강력하고 매우 교묘한 연합 속에서 통상 ‘자본’은 뒤에 숨고 ‘보수’와 ‘자유’는 서로 싸운다. 그 싸움의 목표는 지배연합 내의 몫, 더 큰 떡일 뿐이다. 하지만 이 떡의 유혹은 매우 커서, 보수와 자유는 마치 원수지간처럼 싸우기도 한다. 보수언론과 자유주의 언론은 그들 스스로도 가담한 이 싸움이 마치 온나라의 명운을 건 싸움인 듯 포장한다. 그러므로 ‘진짜 싸움’, 즉 노동과 자본의 목숨을 건 싸움은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작고 지질한 이기적 싸움인양 취급된다. 노동이, 진보가 이 거짓된 자유/보수의 싸움에 현혹되어 있는 한, 자본과의 진짜 싸움에서 이기길 기대할 수 없다.
 
보수가 집권하면 협박으로, 자유가 집권하면 담합으로, 거부하면 결국 모두 몽둥이로 그들은 노동에게 굴종을 요구한다. 노동운동이 힘겹게 산별노조를 만들고 산별교섭, 산별 노사관계의 정립을 추진했던 것은 김대중-노무현의 자유주의 세력 집권기였다. 그들이 그것을 막았다. 그리고 MB도 계속 막고 있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진출에 대해 끊임없이 ‘비지(비판적지지)론’, ‘사표론’을 내세워 발목을 잡았던 것,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었다. 보수 세력도 막고 있다. 빨갱이 사냥으로. 노동이, 진보가 여기에 놀아나서야!
 
4. 2013년 이후의 노동운동을 위한 준비에 대하여
 
산별노조 건설운동이 좌초 위기에 처했으니 기업별노조 체제로 돌아가자 말할 수 없다. 노동정치의 좌절을 맛보았으니 미국이나 일본처럼 탈정치 노조운동으로 가자고 말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이 노동운동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노동운동 내에서 지금까지를 1기 산별운동, 1기 정체세력화로 규정하고 이제 제2기 산별운동, 제2기 정치세력화를 추진하자는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로 될 수 있는 상황일까? 그렇지는 않다.
 
2012년의 이 고달프고 혼란스러운 노동정세, 정치정세에서 노동의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고 추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노동운동의 막바지 퇴조기다. 퇴조기에 노동운동 지도부의 임무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질서 있는 후퇴를 조직하는 일이다. 지도부가 이 작업을 방기하면 조직원들은 산개한다. 지도부가 과학적 정세 인식을 세워주지 못하면, 일선의 전투 지휘관이 자기 기준으로 판단한다. 바로 공도동망(共倒同亡)의 길이다.
 
두 개의 전선이 있다. 대중적 노조운동의 전선과 정치운동 전선이다. 양쪽 다 무너지려 하고 있다. 둘 다 지킬 수 없고, 노동의 역량을 어느 한 쪽으로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쪽인가? 지금 노동운동 내에서 이 판단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전자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조급한 마음에 후자에 몰두하면 다시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지배담론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물론 전자가 후자의 토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의 경험을 잠깐 보자. 대중조직인 <총평>이 <일본사회당>을 30년 이상 지탱했다. 장기간에 걸쳐 의회의 1/3을 점유했던 제2당이었다. 1980년대 말 <총평>이 무너져 <연합>에 투항했고, 1995년 <일본사회당>이 역사의 무대에서 소멸했다. 지금 일본의 보수양당체제(자민/민주)는 이를 통해 태동했다. 선진국 중 이런 사례는 일본밖에 없다. 더 나가보자. <총평>은 왜 무너졌는가? 두 가지가 지적된다. 첫째, 기업별노조 체제에 안주했다. 둘째, 총평/사회당의 정치불록(=배타적지지) 속에서 노조가 자율성을 잃었고 노조의 직책은 정치적 진출의 개인적 발판이 되었다(노조 지도부의 정치관료화).
 
하여, 나는 지금은 민주노총과 산하 산별조직들, 그리고 활동가 그룹들을 포함하여 우리 노동운동 진영 전체가 대중운동, 대중조직을 지키고 추스르는 데 우선 집중해야 할 때라고 본다. 그러면서 2013년 이후의 정세를 타산하고, 그 속에서 또 하나의 ‘1987년’을 전개할 수 있을 노동운동의 담대한 전략을 기획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 노동운동이 아직도 익숙해 있고, 그래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1987년형(型)의 ‘1987년’이 아니라, 아직은 불확실한 가능성, 그러나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2013년 이후 형(型)의 ‘1987년’을 말함이다. 지금의 노동정세는, 그리고 2013년 이후의 노동정세는, 이 새로운 ‘1987년’이 없고서는 반전이 불가능하다. 1987년에 그랬듯이, 배제된 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새로이 시민권을 요구하고 획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산별도 새 내용을 가질 수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정치도 새 전망을 획득할 수 있다. 가능하냐고? 어떻게 불가능한가? 1987년은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