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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노동정치, 어디에서 다시 출발할 것인가

금속노조연구원   |  

노동정치, 어디에서 다시 출발할 것인가

 

 

이남신(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본산이다. 이 자랑스러운 이름이 지금 21세기 영욕의 세월을 지나 초유의 사면초가에 갇혀있다. 노동현장은 땀흘리는 노동자들의 단내가 여전한데 노동운동은 초겨울 나목처럼 처연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때 희망은 있다는 경구처럼 새봄이 오면 새싹은 다시 움틀 것인가. 노동운동의 위기가 심대했던 만큼 철의 노동자군대란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금속노동자들의 가슴에 다시 파릇한 새봄이 찾아오면 커다란숲을 이룰 묘목 한그루씩 다시 심을 수 있을까. 이런 소회 하나는 남기자는 심경으로 신파조로 달갑지 않은 글을 쓴다.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시발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제1기가 민주노조운동의 쇠락 속에 정파 갈등과 원칙이 실종된 이합집산, 그리고 자중지란에 가까운 분열과 리더십 훼손으로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18대 대선이 코앞까지 다가온 정세속에서 각 후보를 중심으로 선거운동(투쟁)이 진행되고 있지만 기운이 제대로 모아지기는커녕 자조와 무기력이 늘어나고 있을 뿐이다. 한때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외쳤던 일군의 노동운동과 진보정치 지도자들은 야권연대의 미로를 헤어나지 못한채 보수야당의 품에 안겼다. 대선방침조차 없이 지도부 공석으로까지 내몰리며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위기는 쉬이 일단락될 것 같지 않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란 대중조직연합체를 모태로 삼아 태어났다. 그 태생에서부터 노동현장에 토대한 만큼 노동계급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했던 민주노동당에 균열이 간건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과 산별노조들이 미조직 상태에 있는 비정규/중소영세사업장/이주 노동자들을 제대로 조직화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도 올곧게 계급이해를 대표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한마디로 정규직 이해에 발목을 잡혀 전체 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부차화시켜버린 데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이 있다.

 

최근 금속노조 위탁으로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수행한 연구결과를 보면 더 분명해진다. 지난 11년 동안 금속노조 사업장에서 비정규직이 54466명에서 104134명으로 무려 두배 가까이 증가했고 정규직보다 더 많이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은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그동안 금속노조가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차별철폐를 위한 투쟁을 벌였지만 정작 소속 사업장에서는 비정규직 확산을 막아 내지 못한 결과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셈이다. 보고서에서도 지적됐듯이 이는 금속노조 주력인 대공장 노동운동이 임금소득 극대화로 대표되는 기업 내 분배투쟁과 고용안정으로 상징되는 폐쇄적 임단협 전략에 주력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원하청연대가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 노동정치가 텃밭삼아야 할 미조직 노동대중이 홀대받거나 배제된 이런 구조 속에서 진보정치가 알량한 당내지분과 이권 다툼으로 자멸로 치달은건 필연에 가깝다. 어떡해야 하는가.

 

“21세기 외형적인 경제규모로는 선진 자본주의 수준에 이르른 한국 사회가 삶의 질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나쁜 일자리인 비정규직 양산과 차별 심화로 사회양극화와 빈부격차가 구조화고착화되고 사회 전반의 불안정이 심각해져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이 벼랑으로 몰려가고 있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지 않고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발전이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관련 노동운동 주체들의 역할이 갖는 각별한 의미를 주목하면서, 우리는 당면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 해소와 권리 신장, 궁극적으로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지향하고자 한다. 이런 목적 아래 우리 사회 모든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개인과 단체의 힘을 모아 비정규직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해결해 나간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한국비정규직노동단체네트워크(약칭 한비네)를 창립한다.”(‘한비네운영규칙 전문)

 

지난 1129일 한국비정규직노동단체네트워크가 22개월여의 교류 협력 과정을 거쳐 출범했다. 2010916일 첫 번째 12일 수련회를 가진 이후 두세달에 한번씩 12차에 걸쳐 수련회를 가지면서 끈기있게 의기투합해온 결실이다. 열악한 조건에서 지역을 텃밭으로 한눈 팔지 않고 헌신적으로 활동해온 동지들끼리 간난신고와 동병상련의 처지를 공감하며, 또 한편 비정규운동의 사명과 보람을 새삼 확인하며 함께 둥지를 꾸릴 채비를 해왔다. 다양한 정파 멤버십과 이질적인 정치적 지향, 존립 형태도 제각각인 전국의 비정규노동단체들이 하나의 울타리로 모일 수 있었던 건 비슷한 처지에서 비슷한 설움과 어려움을 겪으며 지금까지 버겁게 활동해온 바로 그 공통의 경험 때문이었다. 비정규단체들에 비하면 비교도 안되는 조직력과 활동 자산을 가진 금속노조가 더 늦지 않게 비정규 사업 방향을 제대로 바로잡고 기득권에 연연해하지 않고 계급적 단결과 연대의 정신을 복원한다면 위기를 기회를 전환시킬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감히 단언하건대 노동운동의 조직적인 독자 후보 전술을 바탕으로 한 의미있는 대선투쟁이 유실된 지금은 답답하더라도 현장에서 다시 신발끈을 묶어야 할 때다. 섣부른 상층중심 정치 행각으론 노동정치의 분열과 조급증을 극복하긴 커녕 무기력의 늪에 더욱 깊이 빠질 공산이 크다. 독자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더욱 요원해질 뿐이다. 단결과 연대가 생명인 민주노조운동의 명운은 결국 노동현장의 노동자들과 건강한 간부들에게 달려있다. 비정규직 문제만 해도 얼마나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한가. 급할수록 바른 길로 돌아가라 했다. 소탐대실의 정치 과잉으로 치닫는 발걸음을 현장조직화와 단결연대투쟁으로 다시 모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얼굴을 비쳐볼 거울이 있는가. 스스로 성찰하면서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 근본적인 노동운동과 노동정치의 본령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자각에 바탕한 새로운 계급 주체 형성 전략을 정립하지 않고선 한발짝도 전진하기 어렵다는 무거운 깨달음을 가슴에 품고 호시우행의 끈기와 지혜로 노동현장에서부터 한걸음씩 딛고나가야 한다. 서두르지 말고 긴호흡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