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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놀이문화와 집단의식

금속노조연구원   |  
놀이문화와 집단의식

김영수 경상대 교수

며칠 전에 재미있고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금속노조 ****노동조합지부 간부들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고도리 때문에 사표를 내고 새로운 집행부를 뽑기 위해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놀이 때문에 사퇴라니? 간부들은 조합원들과 함께 놀이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마도 고도리가 사행성 놀이라는 점 때문에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고도리는 그 동안 집안의 행사뿐만 아니라 친목모임의 단골 놀이였고 그 놀이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돈을 잃었다는 결과를 낳곤 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놀이가 보편화된 지금은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 수단에서 인간의 사행심리를 자극하는 고도리 광고를 쉽게 볼 수 있다. 고도리는 대한민국의 성인들 모두가 즐기는 대표적인 사행성 놀이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고도리가 우리들의 대표적 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노동조합 간부들이 공식적인 행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 동료들과 함께 고도리 놀이를 했다는 사실에 놀랄 일은 아니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직도 지도부들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조직문화가 남아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었다. 어떤 조직이든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요구한다. 성실성과 도덕성 및 책임성 등의 자질이 요구되기도 하고, 이러한 자질과 더불어 투쟁성까지 요구하기도 한다. 지도부를 선출하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인 것이다. 이러한 자질을 요구받은 지도부들은 고도리나 인터넷 사기도박과 같은 사행놀이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또한 집단행사를 통한 동료들 간의 소통과 인간적 끈끈함을 강화시킬 수 있는 공동체 놀이를 개발하고 집행해야만 한다. 물론 금속노조 ****노동조합지부 간부들의 고도리 사건은 인터넷 사기도박에 빠져 들었던 또 다른 간부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사건을 조직 내부의 정파 간 혹은 현장조직 간 갈등으로 확대하는 것은 놀이사건의 본말을 전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도리가 대표적 놀이이자 건전한 놀이로 인정된다면, 간부든 조합원이든 그 놀이를 자유롭게 즐길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고도리가 치매를 예방하는 특효약이라고 하면서 고도리 예찬론을 펴기도 하지만, 고도리 놀이가 사행심을 자극하는 도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국민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고도리 놀이는 돈이 오고가야 재미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오고가는 돈의 액수가 적다고 해서 도박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사행성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들은 이미 사행성을 자극하는 국가의 공공적 도박정책에 중독되어 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바다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경마장 도박, 경륜장 도박, 복권 도박 등이 그것이다. 거의 모든 성인들은 대박의 꿈을 안고 로또복권을 단 한 번이라도 사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 거의 매 주 로또복권을 사서 지갑에 고이 접어 보관하면서 대박의 희망으로 일주일을 버틴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을 것이다. 매 주 복권정책의 대박을 실현하는 주인공이 바로 국가인데도, 우리들은 항시 우리들만의 복권리그, 즉 우리들만의 도박현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자본가들이 로또복권을 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길 확률이 적은 게임에 돈을 투자하는 자본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자본가들이나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적 저항을 가장 무서워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들의 재산을 보존해 줄 수 있는 공공적 권력을 만드는데 열성을 다 바친다. 국가권력이 그렇고 법과 질서가 그렇다. 가난한 사람들이 아예 혁명적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 힘도 마찬가지이다. 국가권력의 공공적 도박정책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적 저항을 약화시키는 대표적인 것이다. 집단적 저항은 바로 집단의식의 형성에서 비롯되는데, 도박은 곧 의식과 행동의 개별화를 극대화시키기 때문이다. 세 사람 이상이 모여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화투판은 돈을 따기 위한 개인 간의 경쟁심과 사행심을 자극한다. 이는 곧 집단적 모임의 정체성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건강을 챙기면서도 집단적 모임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집단놀이도 아주 많다. 족구모임이나 축구모임과 같은 스포츠 놀이나 소규모의 동아리 모임 등이 그것이다. 노동현장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집단놀이가 활성화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집단놀이는 개인 간의 경쟁이 아니라 집단 간의 경쟁을 통해 집단적 모임의 정체성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승부욕망을 집단적으로 실현시키면서도 집단을 구성하는 성원들 간의 소통을 강화한다.

승부욕망은 인간에게 삶의 존재의의를 적지 않게 부여하기도 한다. 도전정신이나 모험정신을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표시하는 것도 아마 그러한 사람을 통한 대리만족의 경우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승부욕망을 지배하는 힘은 게임에 참여하는 주체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포위하고 있는 사회적 존재기반에 의해 좌우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힘은 바로 자본이다. 특히 사이버 공간에서 작동하는 승부욕망은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돈을 투자하지 않으면 승리하기 어려운 인터넷 게임이 그렇고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각종의 도박이 그렇다. 사기도박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인터넷 자본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놀이문화를 지배하면서, 이러한 승부욕망의 실현 여부가 돈을 투자하는 개인의 문제로 전락시켰으며, 집단적 놀이를 개별적이고 이기적인 놀이로 대체시켜 버린 것이다. 개인의 승부욕망을 조작하는 인터넷 자본은 개인의 놀이를 지배하지만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외부의 힘일 뿐이다.

노동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역시 승부욕망을 가지고 있다. 각종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해왔던 고도리 놀이는 노동자들의 개별화된 승부욕망을 실현하는 공간이자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집단적 모임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까지 개인 간의 경쟁심과 사행심을 즐겨왔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집단적 승부욕망은 노동현장에서 실현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의 진정한 경쟁 대상은 바로 자본이다. 자본은 노동자들의 놀이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자본은 고용안정이라는 조건을 내세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있고 노동자 간의 고용경쟁을 극대화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놀 수 있는 시간을 강제적으로 빼앗아 가고 있다. 노동자들이 실제 노동시간을 줄여 나가야만 할 경쟁의 대상이 바로 자본이다. 노동자들이 가족이든 친구이든 혹은 동아리든 집단놀이를 보다 많이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할 기본적 권리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속 편한 사람들만이 하는 고민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월급이 줄어들어 당장 생활의 고통을 겪어야만 할 노동자들에겐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들만의 도박리그’라 하더라도 로또복권의 대박 꿈을 놓지 않는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간단하게 대답할 것이다. 진짜 놀고 싶은데 돈과 시간이 없다. 여기에 해답이 있다. 노동자들이 돈과 시간을 확보하면 된다. 노동현장에서는 하루 8시간의 노동으로 생활하는데 고통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생활임금을 확보하면 되는 것이고, 생활현장에서는 소비 중심의 사회적 권리를 확보하면 되는 것이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임대주택 등의 사회적 권리를 노동자들이 확보한다면, 노동자들은 집단놀이로 집단적 승부욕망을 실현하면서 ‘우리들만의 도박리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바로 자본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자본과 개별적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집단적 정체성, 즉 노동자 계급의식을 강화시키는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들만의 도박’이 계급의식을 형성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면, 우리들은 공공적 도박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국가와 자본을 대상으로 치열하게 투쟁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