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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제조업의 현황과 구조적 특징

금속노조연구원   |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고가 한국경제를 삼킬 기세인 2008년 현재, 앞날을 한 치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어쨌든 한국경제의 외형은 상당한 수준에 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외환위기 직후를 제외하고는 거의 예외 없이 성장을 거듭한 한국경제는 2007년에 사상 최초로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돌파하고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3위의 경제 강국 위치에 올라섰다. 이러한 성적은 지난 시기 압축적 고도성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압축적 고도성장의 배경에는 국가주도의 선별적 산업정책이 주도한 제조업, 특히 중화학공업의 눈부신 성장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경제는 빈약한 자원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값싼 노동력의 양과 질을 빠르게 향상시키면서, 단기간에 자본의 집중도를 높이고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극대화하면서 성장하였다.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가용자원을 집중한 다음 이로부터 얻어지는 생산과 성장의 이익을 다른 부문으로 전파함으로써 그 지렛대 효과를 배가하는 전략이 주효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10년 동안 한국경제는 이러한 전략이 한계에 부닥쳤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난 시기 성장을 주도해 왔던 소수 대기업과 일부 산업의 성과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더 이상 국민경제 전체의 성과로 파급되지 않는 현상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양동이에 물이 차면 아래로 흐른다는 이른바 ‘낙수(trickle-down)효과’를 전제한 선별적 육성 전략이 유효성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수 대기업과 소수 부문의 탁월한 성장은 다른 부문의 균형적인 성장을 가로 막고 있다.

예컨대, 대기업들의 글로벌 아웃소싱은 내수 부문에의 중간재 의존도를 약화시키고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경공업 부문과 중소기업의 해외진출을 유인하고 있다. 대기업들이 수출에 기대어 ‘나 홀로 성장’하는 동안 첫째, 내수 성장률과의 격차가 커지고, 둘째, 중소기업의 부가가치 비중이 하락하고 있으며, 셋째, 위계적 수직계열화가 강화되고 있다.


이른바 한국경제의 ‘3불(不) 현상’-불안정, 불균형, 불연관이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먼저 불안정의 측면은 수출의존도가 높아지고 금융시장의 개방수준이 높아지면서 대외적 부문과 금융적 부문에서 기업 활동의 취약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수출입 가격과 환율의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위험이 더욱 커졌으나, 이런 변동성을 관리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기업은 소수에 불과하다. 여기서 두 번째 현상, 곧 불균형 현상이 발견된다. 앞서 불안정한 경제에 대응할 수 있는 집단은 소수 기업에 불과하며 이들이 바로 불균형 성장에서의 수혜집단에 해당한다. 매출, 부가가치, 성장성, 재무성과 등에 있어서 일부 기업의 독점 혹은 과점 상태가 높아졌기 때문에 다른 다수 기업의 시장상황 대처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연관은 산업연관의 약화를 의미한다. 개발연대와 고도성장 시기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곧바로 연관된 경공업의 발전을 유인했을 뿐만 아니라 서비스업의 성장에도 기여했다. 성장은 고용의 확대로 이어졌고, 고용 확대는 소득확대로 이어졌다. 가계의 소득이 증가하자 소비가 활성화되면서 다시 성장을 견인하는 선순환 연관 고리가 작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산업구조가 변화된 이후의 최근 10년 동안 성장과 고용, 내수 사이의 연관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의 1990년대(1991~1996년)에 실질GDP는 7~9%대 성장을 거듭하면서 매년 평균 46만 명의 신규취업자를 배출했으나, 2007년에는 5% 성장에 신규취업자 28만 명으로 하락하였다. 수출은 2000년대 들어서도 두 자리 수 증가를 지속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끌고 있으나, 1995년 9%에 달했던 소비지출 증가율과 18%에 달했던 설비투자 증가율은 2007년 현재 각각 4.7%와 7.6%에 그쳐 외환위기 이전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고용, 소비, 내수가 모두 늘어나지 않으니 국민경제의 성장잠재력이 하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한국경제의 대기업, 수출위주 운영이 자리 잡고 있다. 불안정, 불균형, 불연관의 3불은 사실 같은 내용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경제의 안정성 제고와 균형적 발전 그리고 유기적 재구성을 향상시키는 데 있어 대기업, 수출위주 운영은 일대 전환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번 연구는 3불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 전체의 고용창출력을 높이기 위한 핵심 고리로서 제조업의 국내 역량 강화 방안을 모색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제조업의 성장방식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축적체제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IMF의 구조조정 처방에 따라 세계경제에 더욱 깊숙이 편입된 한국경제의 특징은 흔히 금융의 개방과 대외의존도의 심화라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안현효, 2007). 이는 한국경제의 발전 양상을 규정하는 세계체제적 조건과 내부의 전략적 특성(자세한 설명은 윤상우, 2006을 참조), 모두에서 일정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말한다. 이전 시기 한국경제의 발전에서 외적 구속력을 갖는 세계체제적 조건이 미국 헤게모니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군사적 경향을 강하게 띤다고 한다면, IMF 외환위기 이후 세계체제적 조건은 신자유주의 경제적 경향을 보다 강하게 띤다는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해 한국의 지배집단은 이전 시기에는 가능했던 권위주의 국가권력의 시장개입 전략, 이른바 발전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독자적 경제운용 전략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세계체제적 조건의 변화와 내부 전략의 자율성 제약은 금융부문에서 특히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경제의 운용이 주식시장을 통한 금융규율의 강화, 외국자본이 지배하는 은행산업 등으로 결과지어진 것이다. 대외의존도의 심화 측면에서는 내수 소비가 급격히 감소하는 가운데 수출이 부족한 유효수요를 보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수출부문은 세계경제의 변동에 더욱 크게 영향을 받는 한편, 이로 인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투자의 위축을 가져와 결국 내수부문과의 연관이 약화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경제성장의 동력 역할을 하고 있는 수출부문이 성장의 파급효과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국제분업구조의 측면에서도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을 위한 ‘기회의 창’이 되었던 일본과의 경쟁 및 상호 분업은 질적으로 변화되었다. 한국 제조업 생산의 중심축이 미국의 엄호 하에 한일 간 분업구조에 있었다면 새롭게 중국이 참여하는 한중일 3국간 분업구조로 변화되는 양상이다. 비약을 허락한다면, 간단히 말해 미국이 빠지고 중국이 들어오는 형국이다.


이 글은 지금까지 상술한 조건과 환경이 한국 제조업의 역량과 구조 변화의 요인이라는 기본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후 한국 제조업의 현황과 문제점을 여러 각도에서 고찰할 것인데, 이상의 조건과 환경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한국경제의 고용 문제는 해결이 요원하다.

이 글의 목표는 제조업의 현황을 파악하고 성장-고용의 연관이 단절된 부분을 찾아내는 데 있다. 먼저 한국경제에 있어서 제조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중소기업과 부품소재 산업을 검토하면서 ‘연관의 단절’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전의 연구들이 이미 중소기업의 문제와 부품소재 산업의 문제를 충분히 정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또다시 정리하는 이유는 고용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이들 부문을 제외한다면 어떠한 해답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이 - 비록 가장 크게는 아닐지라도 - 신자유주의 경제에서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장에서는 먼저 제조업을 둘러 싼 세계환경 변화를 검토한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글로벌화와 지역주의, 그리고 생산 사슬의 국제화는 현 시기 한국 제조업의 세계체제적 조건을 규정하는 기본 전제가 된다. 다음으로 3장에서 외환위기로 인한 산업구조의 변화에 대해서 논한다. 제조업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경제의 생산성 증가를 주도하고 있다. 서비스업이 외형적으로 성장했으나, 이는 생산성에 기댄 성장이 아니라 가격인상에 기대 성장임을 보여줄 것이다. 반면 제조업은 IT업종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생산성을 늘리고 있으나 고용을 배제한 성장으로 바뀌었음을 보인다. 3장에서는 구조 변화 이후 제조업의 역량을 개괄적으로 파악해 보는 것이다. 생산성과 무역성과, 수익성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제조업의 성과와 한계를 살펴본다. 4장과 5장은 제조업의 핵심 역량인 중소기업과 부품소재 분야의 현황과 문제점을 정리한다. 제조업 가치사슬의 하위에 위치한 이들의 역할을 높여내는 것에 한국 제조업의 전망이 있음은 물론이다.


제조업의 전망을 마련해내는 것은 사실 경제전반의 축적체제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재벌-금융-권력의 삼각체제는 경제의 축적체제를 변화시켜가면서 노동을 배제하는 성장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단변에 해결하는 것은 여의치 않다. 따라서 몇 가지 핵심 고리를 찾아내고 그 요인들을 단계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이번 연구는 그 첫걸음일 뿐이다. ‘제조업의 국내역량 강화와 기반구축’은 일차적으로는 다국적화/글로벌화되는 경제구조의 변화에 제동을 걸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의 개입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전술적 방안으로 제기된다. 문제 접근이 포괄적이지도, 근본적이지도 못한 것은 필자의 역량 부족에 있다. 보다 구체적이고 깊은 연구는 다음 과제로 넘겨야 함에 양해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