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노조운동, 이제 사회운동과 손잡아야 한다!
금속노조운동, 이제 사회운동과 손잡아야 한다!
공계진 노동연구원 원장
1. 한진중공업 투쟁의 승리 요인은 김진숙 지도위원?
맞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308일에 걸친 크레인 농성이 없었다면 한진중공업투쟁은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회 환노위가 있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그것도 맞다. 사실 김진숙만 있었다면 졌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직 투쟁중이거나. 그래서 사람들은 국회 환노위의 역할, 그중에서도 정동영 민주당 의원의 역할을 거론한다. 환노위가 조남호를 불러다 족쳤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석에 조금 동의하면서도 뭔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 생각도 맞다. 환노위가 있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곁다리일 뿐이다.
2. 한진중공업 투쟁의 승리 요인은 희망버스.
사족부터 달자. 희망버스 앞에는 배와 크레인을 몰고 자본과 정권에 힘차게 돌진했던 한진중공업 노동자와 김진숙이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며 하고 싶은 말을 멈추지는 말자. 투쟁의 승리는 그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진중공업 투쟁 승리에서 희망버스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김진숙의 장기간에 걸친 크레인 농성이 노동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던 많은 시민들을 감동시켰고, 그들은 자발적으로 희망버스를 조직했다.
그리고 금속노조 조합원들을 비롯한 조직노동자들이 주춤하고 있을 때 노동운동 밖의 시민들은 버스를 타고 한진중공업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몇 번 지속되니까 김진숙도 힘을 받았고, 기본적으로 기회주의자들인 국회의원들이 움직였다. 그래서 환노위는 열렸고, 그 자리에서 국회의원들은 정치적 목적으로 조남호를 조져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국회의원들의 등쌀에 뻔뻔함의 극치를 보이던 조남호가 굴복, 권고안을 받아들였다.
그 뒤 금속노조는 거기에 숟가락 하나를 얹었다. 그리고 전리품을 챙겼다. 금속노조 관계자들이 흥분할 수도 있는 발언일 것 같아 사족을 붙이자. 물론 희망버스 조직에 금속노조가 비공식적으로 지원했고, 그 버스에 많은 금속노조 조합원 및 지도부가 탑승했었다. 그리고 집회도 개최했었다. 그러나 이런 사족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진실은 그 버스의 운전기사는 금속노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버스의 기사는 금속노조 지도부, 금속노조 조합원이 아니라 그냥 시민이었다.
3. 되돌아보아야 할 금속노조 운동
금속노조는 15만의 조합원을 자랑하는 산별노조이다. 민주노총, 한국노총을 통털어 가장 큰 단위의 노조이다. 금속노조는 큰 규모만 생각하고 모든 것을 자립적으로 풀고자 했다. 아니 이것은 좋은 표현이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자신들만의 힘으로, 자신들이 갖고 있던 문제만을 풀고자 했다. 일종의 고립주의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화를 자초했고, 금속노조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노동의 힘이 강하고, 자본과 정권이 힘이 약화되었던 시절, 금속노조의 고립주의는 통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경제/사회적 지위는 향상되었다. 그러나 자본과 정권의 힘이 강해지고, 노동의 힘이 약화된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서 상황이 바뀌었다. 금속노조의 고립주의는 더 이상 노동자의 권익, 정치/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노동자들은 탄압에 직면했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쌍용자동차이지만 경주의 발레오 만도, 대구의 상신브레이크, 구미의 KEC, 충청의 유성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 모두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래서 금속노조의 조합원이 5천명 이상 감소되는데 기여했다. 반면 한진중공업은 승리했는데 이들 노조들이 속절없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가? 조직력이 약했기 때문인가? 맞다. 기본적으로 고립주의를 유지하기에는 턱없는 조직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무너졌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해명이 안된다. 희망퇴직, 현장복귀 등으로 조직력이 상당히 무너져 있었던 것은 한진중공업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원인은 고립주의에 있었다. 즉, 이것은 고립주의의 폐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사고방식에 빠져 시민들과 연대하지 않고, 고립적 행보를 해온 결과이다. 쌍용자동차 투쟁을 할 때 쌍용차 정문에서 농성하면서 이런 탄식을 많이 했다. 평택 더 나아가 경기도 도민들, 더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들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연대한다면 이렇게 고전하지 않을 터인데...만약 쌍차 투쟁을 지원하는 버스가 당시에 움직였다면 어떻했을까?
4. 금속노조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
한진중공업 투쟁 승리에 희망버스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도 돌아다닌다. ‘시민들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금속노조는 교섭으로 그 결과를 따 왔다’는 말.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한진중공업 투쟁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적어도 한진중공업 투쟁은 △ 금속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이 많이 약화되어 노동자 독자의 힘으로 투쟁을 이끄는 것이 버거워졌다 △ 한진중공업투쟁의 승리는 희망버스의 덕이다 △ 노동자들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시민진영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다라는 교훈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그칠 경우 앞서 언급했던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의 분석은 △ 여전히 노동자들은 자신의 문제(의제)만 갖고 투쟁하고 △ 그리고 이 투쟁을 시민들이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주요하게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의 교훈에 더해져야 할 것은 ‘이제 노동자들도 시민들이 갈망하는 것을 자신의 의제로 받아안고, 시민들과 함께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연대와 동반승리’를 안아 올 수 있고,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동안 금속노조운동은 고립적이었다. 좀더 솔직히 표현하면 이기적이었다. 자신 이외의 다른 계급계층(이하 이웃)의 문제에 대해 소홀했었다. 이웃과 소통을 잘 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이웃의 도움을 잘 받지 못했다. 아픈 이야기이지만 쌍용자동차 투쟁, KEC, 유성의 투쟁이 노동자들만의 투쟁, 고립적 투쟁으로 되었던 것은 노동자들이 이웃과 소통을 잘 하지 못한 탓이다.
한진중공업도 그런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진이 다른 곳과 달랐던 것은 김진숙이 이웃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의 문제로 크레인에 올라갔지만 목숨을 담보로 300일이 넘는 크레인 고공농성은 이웃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것은 특수한 경우이다. 모든 투쟁사업장에 크레인이 있는 게 아니고, 모든 노조에 김진숙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새로운 감동을 창출하며 이웃과 소통하고, 이웃의 도움을 받고, 이웃을 도와야 한다. 즉, 자신의 일로 남을 감동시켜 도움을 받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어쩌면 이기적이었던 자신의 활동을 성찰하고, 이제 이웃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자기 자신 및 자식의 고용만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청년실업 및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식의 대학교육시 학자금 받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대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 확대를 위해 싸워야 한다. 돈없는 사람들도 안심하고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무상의료의 확대를 위해 나서야 하고, 자신들의 아파트 구입 또는 평수 늘려가는 이사만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이 집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임대주택의 확대에도 관심을 갖어야 한다. 자신들의 세금에만 관심 갖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어 서민복지가 증진될 수 있도록 사회적 운동을 전개해야 하며, 자신들의 연말 성과급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중소영세공장 노동자 및 비정규 노동자들의 임금에도 관심을 갖고 함께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중소기업들에게 부당하게 가해지는 단가인하에 대해 대공장 사용자들과 투쟁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자영업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운동도 전개해야 한다.
더불어 이들 운동을 하고 있는 소위 사회운동세력과 함께 해야 한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자증세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시민사회운동 진영과 손잡고 함께 가야 한다. 일시적 제스처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받아안고 꾸준히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이 우리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우리를 파트너로 인정할 것이다.
그럴 때 그 이웃들은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이웃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우리 활동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임금 등 근로조건을 주 의제로 하여, 공장안에서 고립적으로 전개하는 운동방식을 갖고는 우리의 이웃과 진정한 소통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핵심적인 전환은 임금중심의 조합활동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임투를 하지 말자는 것과는 다르다. 임투를 하되 물량의 덫에 빠져 일년내내 그것만 하는 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시민/사회적 의제를 갖고 이웃과 함께 소통하는 운동을 임투 못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업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사족 하나 더. 이런 전환을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목표가 분명해져야 한다. 지금처럼 물량확보->노동시간확보->임금극대화라는 운동의 목표만 갖고는 임투중심의 사업방향을 전환하기 힘들다. 전환은 세상을 바꿔 진정한 노동자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표 설정을 할 때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