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기 집행을 돌아보면서 '희망'에 대해서
6기 집행을 돌아보면서 ‘희망’에 대해서
박유기 금속노조 위원장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인사요 안부의 말이다.
7기 임원선거를 앞두고 주위분들의 출마 권유와 협박(?)을 받으면서 끝까지 거부했다. 물론 ‘7기 임원선거에 나올 꿈도 꾸지마라’이렇게 벼르는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안다. 아무튼 출마를 거부하면서 내가 내세운 이유는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있다. 위원장 명찰을 더 달고 다니는것 보다 현장 조합원 속에서 내 역할을 다시 찾아 보겠다”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동지들에게 걱정을 끼친것 같다. 아무튼, 7기 임원선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나의 임기는 정확히 한달이 남아있다. 이 시점에 “6기 집행에 대한 소회를 글로 정리해 달라”는 요청으로 이글을 쓰게된다.
2009년 10월 1일 금속노조에 왔을때 규약에 근거도 없는 기업지부는 그대로 있었고, 기업지부해소문제가 정리되지 않으면서 지역지부는 임원선거도 못하고 있는 조직상황 이었다. “기업지부를 해소하자”고 주장해왔던 나는 기업지부 2년 연장안을 제출했고, 그해 11월 임시대의원대회를 거치고, 12월에야 지역지부 임원선거를 치러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정상화 시켰다.
금속노조 대의원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조직내부 문제점의 핵심은 “의결따로 실천따로”, “정파간 불필요한 갈등”, “소통부재”등 세가지로 압축된다.
집행 초기부터 정파간 갈등과 소통부재를 해소하기위해 가급적 내 고집과 주장을 앞세우지 않고, 많이 듣고, 다수의 의견으로 결정을 모을려고 노력해왔다. 제 정파가 다모여있는 임원회의를 매주 열어 일정과 의견들을 조정하고, 실장 중심으로 해오던 상집회의를 전체 사무처가 함께 참여하는 회의로 확대해서 매주 월요일 열었고, 중집회의도 거의 매주 열어서 소통을 통해서 조직내부의 갈등을 해소해왔다.
이명박 정권은 추미애를 앞장세워 타임오프와 교섭창구단일화라는 악법을 2010년 1월 1일 새벽에 날치기했다. 민주노총 차원의 대응은 집회와 천막농성, 정치적공세 이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금속노조는 4월 27일 총파업을 위해 15만 노조가된 후 한번도 실시하지 않았던 15만 전 조합원 총파업 총회를 밀어붙였다. 전체적으로 과반수 이상 찬성을 얻었지만 최대 조직인 현대차지부는 50% 찬성에 실패했다. 4월27일 직전에 열렸던 중집회의에서 각 지부장들을 통해서 파업이 가능한지 점검을 했지만 대부분의 지부가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특히 현대차와 기아차 지부를 비롯한 대공장의 파업 참여가능성은 없었다. “대공장 다 빠지고 우리같은 중소기업만 파업에 내몰아 총알받이 만들면 금속노조 끝입니다” 선거운동할 때 대구지역 현장에서 만난 조합원의 충고가 떠올랐다.
파업은 5월로 연기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후에도 2010년 6월 타임오프관련 총파업, 11월 김준일지부장 분신관련 총파업, 현대차 비정규 점거농성관련 총파업, 2011년 교섭창구 단일화 분쇄를위한 6월총파업등 몇 차례 더 총파업을 결의했지만 실제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때마다 나름의 원인이야 있었지만 위원장으로서 ‘금속노조 총파업이 내 의지대로 안되는구나. 현대기아차 지부가 무쟁의로 가는 상황에서 부품사 파업까지도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에 빠졌다.
2009년 하반기부터 2011년 8월말 현재까지 발레오공조 자본철수, 한진중공업 구조조정, 발레오만도 직장폐쇄, 구미 kec직장폐쇄, 김준일 지부장분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점거파업,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유성기업 직장폐쇄등 자본의 끊임없는 침탈에 맞서는 금속노조의 투쟁은 단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기륭전자, 동희오토, GM비정규지회, 포레시아, 파카한일유압, 금호타이어, 상신브레이크, 시그네틱스, 한국산연, 대우자판.... 전국적으로 장기투쟁 사업장의 투쟁은 일상화 되어있다.
이명박 정권은 타임오프를 앞세워 노동부가 ‘노사자율’ 원칙을 짖밟고 사업장 교섭에 직접 개입하면서 단협시정 명령을 내리고, 심지어 검찰에까지 넘겨 끝까지 탄압을 자행하는 가운데 자본가들은 기획적으로 금속노조 탈퇴공작을 벌였고, 복수노조를 만들어 교섭권을 강탈하려는 시도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위원장으로서 위원장실에 머무는 시간보다 길거리에서 또는 투쟁현장에, 집회현장에, 국회에, 기자회견장에 머무는 시간들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어느분이 저를보고 하시는 말씀 “바쁘기는 엄청 바쁘게 쫒아 다니는데 해결되는 것이 제대로 없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이를 해석하면 그만큼 내 실력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임기를 마치면서 6기에 대한 진단과 금속노조 과제에 대해서 좀 더 풍부하게 정리해서 7기 집행부에 인계를 해주겠다는 생각으로 별도의 글을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는 생각나는 몇가지만 이글에서 정리해본다.
20년 이상 기업노조의 경험뿐인 기업지부가 지역에서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선 공동사업에 경험이 거의 없는 조건에서, 전임자 임금금지와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라는 자본의 공세가 날카롭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노조내의 극심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면서 기업지부 해소를 밀어 붙이는 것이 조직발전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기업지부가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다만 그 기간이 얼마일지 몰라도 기 결정된 지역공동시업에 금전과 인력을 집중 투입해서 지역 산별의 기틀을 쌓아 나가야 한다.
그리고 초기업단위의 교섭구조를 만들어가면서 중앙교섭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교한 교섭전략을 추진하는것, 산별노조로서의 발전전망을 노조간부들부터 공유하고, 의식을 높여나가도록 노조간부 의무교육등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이다.
내가 해내지 못했지만 바램인데, 금속노조의 정책역량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서 ‘금속노조 사무실에 책상다리 붙잡고 앉아있는 연구위원들이 현장을 얼마나 아냐?’라는 식의 시건방진 비아냥을 제압하고, 금속 산별운동의 좌표를 생산하는 정책공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현대차 그룹의 금속노조에 대한 대응구조는 계열사 노무담당자회의를 통한 일사분란한 대응과 물량을 무기로한 부품사 길들이기로 정리되는데, 금속노조 차원에서 현대차그룹에 대한 별도의 대응팀과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앞으로 2년동안 거창하게 이렇게 만들겠다. 이렇게 바꾸겠다는 건방진 약속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2년 임기가 끝나는 시점에 ‘그래도 금속노조가 희망이 있구나’라는 가능성을 만들고 싶습니다”
2년전쯤 위원장 당선되고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했던 말이다.
2011년 8월 31일 오늘 ‘금속노조가 희망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나에게 여러번 던져본다. ‘충분히 희망이 있다’고 말 할려면 그 근거가 분명해야 하는데 그것이 뭘까?
분명한 것은 금속노조를 해산하고 기업별 노조로 돌아가면 지금보다 나아질게 없다는 것이 대부분 조합원들의 확신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기업별노조가 아닌 산별노조가 맞는데, 금속노조가 아직까지 10년, 아니 15만 조직의 5년에 역사를 감안 한다면 지금은 시행착오도 있고, 실험하는 시기일수도 있다, 실패 할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패배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륭전자, 동희오토, GM비정규투쟁등 작게나마 승리하는 투쟁도 있고, 르노삼성자동차지회처럼 새롭게 금속노조로 조직되는 노동자들도 있음에 우리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정권과 자본의 총체적인 탄압에 맞서 기업을 뛰어넘는 정책대안을 만들고 이를 관철하기위해 함께 투쟁하면서 우리는 더 큰 희망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시간에도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는 김진숙지도위원과 4명의 동지들이 목숨건 점거투쟁이 계속되고 있고, 전국 곳곳에 투쟁 사업장 동지들이 금속노조의 깃발을 움켜쥐고 자본과 정권에 맞서 당당하게 투쟁하고 있다.
나는 이분들이 금속노조의 희망에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 동지들의 투쟁을 우리의 투쟁, 금속노조의 투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동지들이 희망이고, 그 생각을 실천으로 행동하는 동지들이 한분, 한분, 더 늘어날때 금속노조의 희망은 점점 더 커진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