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12년, 노동이 할 일은...
2012년, 노동이 할 일은...
한국노동운동연구소 부소장 정일부
1. 돌아온 정치의 계절
2012년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올해는 미국·중국·프랑스·러시아 등 70여 나라에서 선거가 치러지는 등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정치 격동기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나아지기는커녕 유로존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으며, 세계경제포럼에 모인 각국의 경제지도자들조차 신자유주의가 다 된 것 아니냐는 얘기들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총선과 대선이 한꺼번에 치러지는 2012년, 정치의 계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총선 고지를 넘어 대선에서 마침표를 찍어내기 위해 다들 바삐 움직이고 있다. 정치의 계절 2012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결말로 나타날까? 선거국면을 앞두고 한번 가상을 해보는 일도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다수를 차지할 것 같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러는 가운데 통합진보당이 얼마나 약진을 할 건지가 또 하나의 관심사이다. 그렇게 총선에서 야권이 승세를 탄 후에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대선을 향해 연합정권을 만들어가는 구도라고 벌써부터 예상들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대선에서 야권이 이기리라는 보장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분석들이다. 그렇다 해도, 엠비가 여권에서조차 벌써 뭇매를 맞고 있는데다 총선 후 여소야대까지 되면,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 예견되기도 한다.
상황이 이러니, 다들 선거 국면을 어떻게 대응할지에 많은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한국노총은 일찌감치 민주통합당에 들어갔고 민주노총도 정치방침 수립에 부심하고 있다. 민주노총 산하 산별조직들도 정치전선을 어떻게 형성할지 투쟁일정을 짜느라 바쁘고, 청년유니온 대표는 민주통합당에 가느니 통합진보당에 가느니 하면서 설왕설래가 되고 있다.
2. 판보다 중요한 게 내용인데...
판이 어떻게 바뀔지보다 중요한 것이 내용일 텐데 이렇게 다들 바삐 움직이고 있는 정치국면에서 의제들은 어떻게 돌아가게 될까?
지금까지 진보정당들이 주장해왔던 복지문제와 재벌개혁을 이제 민주통합당은 물론이고 한나라당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 이상 복지나 재벌개혁 문제를 비껴가서는 표를 얻기 어려워진 탓이다. 하기는 포퓰리즘이라 비난은 했지만, 선거를 코앞에 두고도 포퓰리즘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한나라당에서 내놓고 있는 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통합당에서 주장하는 복지정책이나 재벌개혁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복지는 얘기하되 노동은 빠져있고, 재벌개혁을 얘기하지만 중소영세 사업자나 노동자들의 참여와 대표권 문제는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사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의 바뀐 주장에 비정규직 관련법 개정과 노동시간 상한제 실시, 재벌 관련 경제민주화와 당사자 참여방안이 들어간다 해도, 지난 10여년을 돌아보면 구체적인 실현에 대해 진정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2012년의 결론 즉, 흔히들 말하는 2013년 체제는 그 최대치가 민주주의의 회복과 남북협력의 재개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3. 노동이 할 건 무엇이지?
이러한 때 노동은 무엇을 해야 할까? 노동이 주력해야 할 것은 재분배 차원의 복지 확대를 넘어 왜곡된 분배구조 자체를 바꾸어내는 일이고, 비정규 문제와 양극화 문제의 정점에 있는 재벌체제를 해체시키는 일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 인권의 기본바탕이 되는 실노동시간 단축과 각종 노동권의 보호를 확대·강화시켜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직법 개정과 노동시간 상한제를 위해 보다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고 또한 재벌해체를 요구하면서 경제민주화 투쟁을 더욱 힘차게 하면 되는 것인가? 물론 정치전선이 열릴 때 더욱 힘차게 투쟁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다들 좌클릭 하고 있는 정세에서 그것을 넘어설 정도로, 즉 노동이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은 짚어봐야 한다.
지금까지의 노동의 모습으로 보면 정세를 주도하기는커녕 여전히 자기 문제 해결하는 데 급급해하는 게 아닌가 싶다. 민주노총은 물론이고 산하 주력부대인 금속·공공의 경우도 오래된 관성대로 투쟁일정을 잡거나 아니면 자기 산별노조의 요구들을 제기하는 데 머무르고 있는 모습들이다.
물론 이런 현상들은 중앙만의 문제가 아니며, 전반적인 현장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다. 대기업 지부·지회에서 산별노조의 방침이 지켜지지 않고 공공기관들의 현장교섭에서는 중앙이나 지역본부의 방침과 무관하게 이면합의가 횡행하는 현실. 중앙을 움직이는 바탕인 현장이 이런데, 어떻게 당면투쟁에 조직적인 힘을 실을 수 있으며, 어떻게 노동이 정치전선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
주체의 상태가 이렇다면, 2012년에 노동이 주력할 일은 오히려 2013년 이후를 준비하는 데 두어야 하지 않을까? 당면한 투쟁 과제와 선거국면의 활용은 할 수 있는 만큼 하되, 전략적인 집중은 오히려 내후년과 그 이후를 바라보는 데 역점을 두고 가야 하지 않을까? 올해 선거의 결과 정권교체를 이루어내고 그래서 2013년 체제를 만들어 민주회복과 남북협력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더라도, 재벌체제가 살아있고 신자유주의가 바탕을 이루는 한, 2013년 체제에 대한 반복되는 배신감과 허탈감은 조만간 확인될 미래가 아닌가? 그나마 노조 경험을 가지고 있는 조합원들이 몇 년 있으면 대거 정년퇴직들을 하고 정부·자본은 값싼 노동력을 손쉽게 쓰기 위해 이주노동자 확대정책을 계속 구사할 텐데, 이렇게 노동의 주체들이 빠져버리고 흩어질 때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특히 새로운 주체인 젊은이들이 정치에서의 거듭되는 배신감과 좌절에 다시 빠지고 말 텐데, 그때는 어떡할 건가?
결국 지금 노동이 할 일은, 전략적으로는 2013년 이후를 이끌고나갈 조직력을 갖추는 일이고, 전술적으로는 그것을 위해 비정규법개정·노동시간단축·재벌체제해체를 중심으로 2012년 전선을 뚜렷하게 만들어내는 일이 아닐까?
4. 전략적 준비, 어디서부터 할까?
87년과 비교해볼 때 지금은 노동조합의 일상활동이 대부분 없어지고, 조합원들도 나이가 많아서 개별적으로 노후 걱정들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87년부터 전략적으로 추진해온 산별노조와 정치세력화를 보면, 산별노조에 대한 응집력보다는 흩어지려는 추세가 강해지고 정치세력화 역시 무원칙한 분당과 통합을 거치면서 현장의 증오와 무관심은 굳어지는 상태다. 이 상황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인력과 조직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재원을 비정규직 조직화로 집중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은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
전략이라 해도 사실 별 건 아니다. 남아있는 생명력을 모아내자는 것이고, 2013년 이후의 씨앗이 되기 위해 그것을 잘 가꾸자는 것이다.
87년 당시 노동조합 만들 때는 억압적인 노무관리에 맞서기 위해 함께 싸우고 움직이면서, 서로 동지애를 나누고 노동조합을 삶의 공동체로 만들어갔다. 노동운동의 오래된 미래인 원산노련도 조선노동공제회를 병행해나갔고, 노동운동의 출발이었던 영국의 경우도 노동조합의 투쟁과 협동조합 조직이 하나의 뿌리에서 발전해나갔다. 노동조합을 사업장 내의 경제적인 문제에 국한했던 게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SNS가 발전해서 뉴욕의 Occypy Wall-street 투쟁이 금방 전세계로 확산되듯이,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광범하게 전개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내용면에서도, 신자유주의의 수명이 다 됐다는 얘기도 쉽게 공유할 수 있고 이제 새로운 사회를 향해 삶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예전보다 수월하게 나눌 수 있게 된다. 수평적인 관계의 확대가 질적 발전을 가능케 할 만큼 환경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 노동은 생명력 있는 움직임들을 발굴하고 모아내는 데 무엇보다도 힘을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꼭 노동조합이 아니라도, 한발 더 나아가 비정규직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삶의 모순들과 싸우고 뭔가 새로운 희망을 만들려는 움직임이라면 그것을 살려내고 키우는 데 투자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계급내 연대도 못하고 있는데 계급간 연대를 할 수 있을까, 뭐 꼭 그렇게 볼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뭔가? 이미 많은 사람들 입에 회자되듯이 민중의집이고 성미산마을이며 청년유니온일 수 있다. 또 희망터이고 구로공단 조직화이며, 여러 지역에서 풀뿌리처럼 자라고 있는 생활협동조합들일 수 있다. 그리고 혹시... ㅇㅇ은대학은 들어봤을까? 사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비록 작지만 재미있게 의미를 찾아나서는 움직임들이 많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노동이 할 일은,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수평적인 연대, 주체적인 생활문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미있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 재래시장에 가서 함께 룸바춤을 배워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