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2> 둘이 걸어요~
금속노조연구원 |
2012.05.01 00:00
둘이 걸어요~
정일부 노동연구원 자문위원장(한국노동운동연구소 부소장)
1. 진보정치의 실종?
총선이 끝나고 여러 평가들이 나온 가운데 이제 다들 대선을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많은 사람의 예상과 달리 나온 이번 총선 결과는, 그렇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배제당하고 있는 노동 측의 앞날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진보정치의 실종이다. 진보신당 등이 등록 취소를 당하고, 통합진보당에 대해서는 계급성이 없다는 지적들이 많다. 이런 비판에 대해 통합진보당의 한 당선자는 ‘당의 계급성이 희석됐다는 것은 팩트가 아니다. 노동 관련 인식이나 정책은 후퇴하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보다 훨씬 많은 의석수를 차지한 민주통합당조차 대표가 사퇴하는데, 그보다 성과가 떨어지는 데다 특히 노동자지역에서 참패한 통합진보당의 경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데서 뚜렷이 확인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진보정치에서, 노동은 중요한 초점이 아니라는 반증 아닐까?
제반 영역에서 노동이 배제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정치 영역에서조차 이렇게 노동이 경시되고 있는 것은 사실 몇몇 명망 있는 정치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동안 노동자들이 움직여온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초기 민주노동당이 한두 집단의 패권주의 때문에 심각하게 흔들릴 때도 또 그에 반대해 진보신당을 만든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사실 몸이나 대고 돈이나 댔지 정당활동과 노조활동을 통일시켜내지 못했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라도 작으나마 정치활동을 직접 책임지고 나서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지금 노동정치의 씨가 말라가고 있는 원인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누구를 욕할 게 아니라 노동자 자신을 돌아볼 일이 아닐까?
노동정치는, 선거와 같은 제도정치적인 활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정치는 선거 시기를 넘어서 일상활동으로 이루어지고 특히 현장활동이 무엇보다 근본을 이루는 것이다. 결국 지금의 실종되고 있는 노동정치의 현실은 ‘노동조합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동전의 양 측면을 이루는 문제이다. 이번 총선 결과를 보면서도 결국 현장에서의 일상활동 문제를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사실 지금의 상황은 진보정치의 실종 하나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노동운동이 1987년 이래 추진해온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둘 다 난관에 부닥친 상황이다. 지금의 노동운동은 더 이상 생명력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직 망한 정도까지는 아니라 할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 이미 시스템이 작동할 수 없을 정도로 망했다고 할지 아니면 또 다시 수정을 하면서 자기재생산을 해나가는 중이라고 할지 논쟁 중이듯이 말이다. 어쨌든 산별노조가 모양만 부분적으로 갖추었을 뿐 전혀 자기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나 진보정치가 실종되어버린 것이나 둘 다, 거의 막바지까지 온 것은 분명해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산별노조들도 자신에게 닥치는 문제들에 대응하려고 할 것이고, 통합진보당 등도 민주통합당과의 차별성을 강화하기 위해 그래서 의석수를 늘리기 위해 당연히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조직이 움직인다는 것과 운동이 살아있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닐까?
2.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렇게 된 데에는 지금까지 산별노조와 정치세력화를 추진해온 운동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산별노조 건설과정이 조직형태를 갖추는 데 급급했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보다 중요한 것은, 뭘 하려고 하는지가 불분명한 채 활동들이 추진되어 온 때문이 아닐까? 전략 방향도 없이 앞에 나타나는 문제를 헤쳐 나가는 데 머물렀기 때문 아닐까? 지향하는 방향들을 가지고 노동자들이 생활 속에서 서로 토론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운동이 아니다 보니, 정치세력화 과정에서도 앞장선 몇 사람한테 돈 모아주고 필요할 때 동원되어주는 것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렇게 일상적인 활동과 모임을 만드는 일에 너무 소홀히 해온 때문 아닐까?
그렇게 세월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그동안 노동조합 했던 사람들은 이제 나이도 많아졌고, 임단투는 시작할 때부터 벌써 끝을 볼 줄 알 만큼 빠삭해졌지만 사회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동안 해놓은 게 별로 없어보이는 그런 모습들이 아닌가? 사회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요구할 줄은 아는데, 그것을 스스로가 책임지고 만들어낼 실력은 별로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닌가?
거기에 이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도 변화되고 세상도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 올해부터 핵가족을 넘어 1인 가구의 비중이 가장 크고, 이 추세는 이후 더욱 커질 것이라 한다. 인구가 고령화되고 있는 문제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의 주요 변수로 제기되어 왔다.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SNS의 광범위한 활용 및 위키피디아가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을 침몰시키는 등 웹2.0을 이용한 실시간네트워크 등이 세계적으로 확대해가는 추세이다.
그동안의 낡은 사고와 운동방식으로는, 이제 따라잡기는커녕 도태되기 좋은 조건들이 점점 많아지고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3.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단위노조들이 산별노조가 되고 학고방 같은 진보정당이 10여석 이상의 원내 정당이 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덩치가 커졌다고 조직이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타이타닉은 어디 작고 느려서 두 동강 난 것인가?
그렇다면, 운동의 리모델링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노동운동의 위기를 토론할 때마다 매번 나오는 지적이지만, 역시 일터에서의 활동과 삶터에서의 생활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일터의 활동과 삶터의 생활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회가 유지되는 원리로 보면,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일터에서 자본가에게 노동을 팔아서 임금을 받고 삶터에서 자본이 파는 상품을 구입해서 살아간다. 노동 전체 입장에서 보면, 중간에 자본가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남겨주는 것 외에는, 사실 노동자가 만든 것을 노동자가 사는 과정이다. 그러면서 노동은 그 노동과정에서 지치고 소비는 더욱 피폐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노동자이고 동시에 소비자이면서도 자신을 하나로 통일시키지 않은 채, 직장에서는 자본가의 지휘 하에 움직이고 집에 가면 개별 소비자로 기업들의 사냥감으로 얽매여 지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일터와 삶터의 활동을 일치시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일터에서는 작업과정이 인간화되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이며, 이는 노동자의 작업권을 보장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노동시간 단축과 제반 노동권의 보호를 확대하는 것이고, 정규직·비정규직의 차별을 없애는 것이며, 이를 위해 불평등과 양극화의 주범인 재벌체제 해체에 활동타겟을 맞추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터에서의 활동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자본의 이윤을 위한 착취구조에 대항하여 사람 중심의 소비활동, 즉 교환가치에 따른 소비가 아니라 사용가치를 중심으로 필요에 따른 소비생활을 하는 것이다. 집에 가서는 개인으로 무장해제된 채 자본가의 사냥감으로 전락할 게 아니라,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생필품·교육·의료·문화·환경 등 모든 방면에서 노동자들의 소비를 함께 조직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미 노동력을 팔았다면 그 노동력의 주체성을 되찾는 일이고, 동시에 각개격파 되어 있는 소비자의 자주성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곧, 노동조합 활동과 협동조합 활동의 통일에 있다.
노동조합 활동과 협동조합 활동의 통일, 이것은 노동자 개인의 생활을 온전히 인간화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정치적 민주화가 일정하게 진행되었지만, 경제민주화는 여전히 질곡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사회 제반 영역에서 노동권은 항상 배제되는 반면에 재벌체제는 오히려 국가보다 우위에 서서 사회악을 진두지휘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재벌체제가 보수정치권보다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보정치의 뿌리를 만들어내고 골목마다 경제적인 진지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문제에만 국한되어 있는 노동조합을 노동과 소비의 통일로 인간화 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을 다시 주체화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정치적 민주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한계 지점을 극복하는 출발점이기도 한 것이다.
4. 출발은 주체의 현실에서부터
그러나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지금 노동운동의 주체들이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조직노동자들의 모습이 어떤지, 노동자들을 이끌고 있는 노동조합 조직은 어떤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제 한번,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조직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문제, 사회복지 문제, 경제민주화와 같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정말 투쟁할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일까? 노조에서 하라고 하니까 하는 행동 말고, 자기 생활에서 그 필요성을 직접 느끼고 스스로 움직이려고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있다면 과연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같은 보수정당들이 대부분의 의석을 차지하도록 표를 몰아줄 수가 있을까? 혹시 다수의 노동자들이 사회 발전을 위해 싸울 생각이 없는데도, 노조가 매너리즘에 빠진 채 투쟁 일변도로 가는 것이 아닐까? 노동조합의 투쟁이야 천민자본주의 때문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활동이지만, 대다수 조합원이 이를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노조 활동가들이 손쉬운 구호외치기에 그치고 그저 앞에 놓인 일들 처리하는 데 만족해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그래서 살아 있는 조합원들의 욕구와 일상활동을 촘촘하게 조직하려는 열정을 잃어버려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한편 대다수 조직노동자들이 생활 속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다양한 일상활동은 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까? 우리 노동자들은 자녀들 보육과 교육에 관한 대화나 학습 모임에 관심이 없어서인가? 동네 환경을 지키는 지역활동을 할 생각들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그리고 굳이 비싼 돈 들이지 않고도 질 좋은 의료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의료생협 같은 활동을 할 의지가 없는 걸까? 살고 있는 동네에서 주민들과 함께 문화생활을 위한 모임을 만들고, 또 함께 살아가는 마을공동체를 만들 상상력을 이미 잃어버린 사람들일까? 그런 활동을 하면서 시청·구청 같은 지자체에 예산감시 활동을 하고, 조례제정 요구 같은 주민자치 활동을 할 능력이 없어서 못하고 있는 것일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박봉에 고용불안 때문에 나설 엄두를 못 낸다 쳐도, 정규직 조직노동자들이 지역활동을 안 하는 것도 그렇게 열악한 환경 때문일까? 아니면 혹시 자기 사업장 안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도 소통을 못하는 조직노동자에게 동네에서 마을공동체 활동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인 것일까?
그러나 산별노조와 진보정치가 난관에 부닥친 현재, 노동은 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그냥 하나의 부분적인 단체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학생운동은 청년의 혈기와 이념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라 시대요청에 따라 80년대처럼 사회를 앞서 이끌어가는 운동이 되기도 하고 혹은 지금처럼 자기 이해에 집중하는 부문운동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경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직업인들의 운동이라는 점이다. 학생은 한 때 한 시절이지만 노동은 평생이며, 학생은 의식적인 문제이지만 노동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다. 때문에 노동운동이 올바르게 발전하지 않을 경우에는 단지 자기 역할을 안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경제 체제 변화에 따라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오히려 퇴보적인 집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의 운동을 보면 노동운동이 자기 문제에만 갇혀 있는 동안 우리 사회의 진보적인 의제개발과 앞선 활동들은 대부분 시민단체들에 의해서 이루어온 것이 현실이다. 사회복지 문제, 에너지·환경 문제, 교육·보육 문제, 의료 문제 등 여러 영역에서 시민단체들은 사회발전을 위해 많은 활동들을 이루어왔으며, 지금도 시민단체들은 마을만들기와 사회적기업·협동조합 같은 풀뿌리 정치·경제 영역으로 확대해나가고 있다. 그 결과, 시민운동의 대부격이 서울시장이 된 데서 상징되듯이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기존 보수정치권을 넘어설 수 있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민단체가 하고 있는 활동을 노동운동이 못할 리 없지 않을까? 시민운동에서 추진해온 수많은 공익적인 활동보다도 노동운동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비정규직 차별철폐투쟁은 우리 사회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공익적인 활동이고 노동자·시민을 주체로 세우는 운동이지 않은가? 그것을 힘있게 못하고 있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제 노동운동은 자기 자리를 다시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그러려면 우선 노동운동의 주인인 노동자들, 특히 조직노동자들의 현실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있지도 않은 노동자의식을 요구하고 스스로 생활에서 느끼지도 않는 투쟁을 얘기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귀 기울이고 가족과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교육의 장과 만남의 장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는 가운데 노동자들이 사회 발전을 위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이끌어주는 다양한 활동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산과 소비는 물론이고 교육·의료·주거·복지·문화·금융 등 전 분야에 걸쳐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은 바로 내 인생을 제대로 가꾸는 일이 아닌가? 조직노동자들이 그런 활동을 싫어할 리가 없지 않을까? 투쟁 역시 그런 생동감과 자발성에서 이루어질 때 강력한 힘으로 모아지지 않을까?
현재의 조직노동자들이 이런 좋은 일에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노동운동이 지금 할 일은 ‘주민과 함께 하는 지역운동, 가족과 함께 하는 조합활동’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일이다. 아울러 조직의 기본적인 운영방침을 수평적 민주주의로 바꾸어내는 일에 전력해야 할 것이다. 자발성과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위·아래가 아니라, 서로 함께 한다는 관계형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아갈 때 비로소 산별노조의 근간이 세워지고 노동정치의 뿌리가 생겨나지 않을까? 그래야 노동운동과 나아가 진보정치까지 새 희망의 기쁨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자,자~ 토론도 길게 하면 힘드니, 이제 가벼운 노래 한 곡 함께 들어보는 게 어떨까?
벚꽃엔딩 - 버스커버스커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오늘은 우리 같이 걸어요 이 거리를
밤에 들려오는 자장노래 어떤가요 오, 예~
몰랐던 그대와 단둘이 손잡고 알 수 없는 이 떨림과 둘이 걸어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오, 예~
그대여 우리 이제 손 잡아요
이 거리에 마침 들려오는 사랑 노래 어떤가요 오, 예~
사랑하는 그대와 단둘이 손잡고 알 수 없는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바람 불면 울렁이는 기분 탓에 나도 모르게
바람 불면 저편에서 그대여 네 모습이 자꾸 겹쳐
오 또 울렁이는 기분 탓에 나도 모르게 바람 불면 저편에서 그대여 네 모습이 자꾸 겹쳐
사랑하는 연인들이 많군요 알 수 없는 친구들이 많아요
흩날리는 벚꽃 잎이 많군요 좋아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오, 예~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