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머~엉'하니 파산해버린 노동정치
‘머∼엉’하니 파산해버린 노동정치
김영수 자문위원(경상대 교수)
2010년 5월 30일, 제19대 국회가 개원하였다. 통합진보당도 제3당이라는 힘으로 국회에 입성하였다. 이제부터는 ‘진보통합정치의 파산’이라는 예고편이 아니라 본방송을 국회로부터 시청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누구든지 눈과 귀로 알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후보 부정선거’라는 막장드라마를 재방송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통합진보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해 온 민주노조운동의 노동정치를 말하려 한다.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부정선거를 비롯해 각종의 투쟁의제들에 대해 ‘멍’ 때리고 있는 민주노조운동을 말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정치는 민주주의를 먹고 살았다. 보수세력이든 진보세력이든 모두가 합창하는 민주주의였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정치에서 언제든지 최고의 가치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형식과 내용에서 너와 나의 민주주의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어떤 이는 자유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정치를 했고 또 어떤 이는 사회민주주의나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정치를 했다. 민주주의는 역사 속에서 누구나가 희구했던 희망의 기관차였다. 민주노조운동이 민주노동당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는 기관차로 나선 이유도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에서 찾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각종 대선이나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에 사람과 돈을 대는 샘물이었고, 노동자 중심의 진성당원체제를 구축하는 요추였다. 1만 원 이상의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체제는 세계사적으로 보기 드문 현상 중에 하나였다.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볼 때, 민주노총이야말로 당의 모세혈관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민주노총의 노동정치가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면서 조합원이나 지도부들에게 제도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고, 제도화된 권력정치에 수많은 진지를 만들거나 활용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전략이었다. 서구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이 추구했던 다양한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익숙한 노동정치의 패턴이었다. 조직적으로 결정되어 유지되고 있는 전략인 만큼, 이러한 패턴의 노동정치가 불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단지 민주노총의 노동정치가 투쟁정치를 포기했던 것 아닌가? 이런 혐의만큼은 자유롭게 하고 싶다. 왜냐하면 지난 5년 동안, 노동정치는 제도화된 권력정치 내부에서 발생하는 ‘그들만의 부패리그’를 감시하고 폭로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또한 민주노총은 반민주적인 이명박 정권을 상대로 혹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추구했던 ‘투쟁정치’라는 자리에 ‘선거정치’가 방석 깔고 주저앉았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민주노조운동은 어느 순간부터 대중들의 투쟁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주변머리로 전락하였다. 이명박 정권을 소위 민주적인 정권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전략은 민주노조운동의 노동정치를 선거정치만을 앞세우는 ‘통합의 권력정치 또는 연합의 권력정치’로 대체시켰다. 민주노조운동의 노동정치는 통합의 대상이 과거에 민주노조운동을 탄압했던 사실은 고사하고 현재 진행형인 각종 투쟁의 가해자였다는 사실까지 눈감았다. 말 그대로 ‘묻지마 통합’이었다. 당시 통합의 진보정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정세를 판단하지 못하는 지진아 취급을 받았다. ‘묻지마 통합’정치는 민주주의라는 최고의 가치조차 묵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만들던 그 시간에 눈보라를 헤치면서 전노협을 만들고 3당합당 세력들을 상대로 투쟁했던 기억은 뒤로 한 채,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억측만을 내세웠던 민주노조운동! 노동정치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세력과도 연합할 수 있다는 부르주아 정치의 공학을 몸소 실현하였다.
민주노조운동의 로맨스는 선거정치에서 꽃을 피웠다.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부정선거’는 백미 중에 백미였다. 부르주아 선거정치가 당선만이 최고의 가치로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당선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직력으로 포장되는 정파세력 혹은 종파세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민주노조운동의 노동정치는 바로 부르주아 정치의 선거정치에 포섭되고 말았다. 그 주체들은 단지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나 간부들을 넘어서서 조합원과 활동가들도 포함된다. 민주노조운동의 각종 지도부를 선출하는 투표, 투쟁전략을 결정하는 투표, 그리고 그 전략을 집행하기 위한 각종의 투표가 정파적 혹은 종파적 메카니즘으로 작동되었고, 조합원들도 이 과정에서 선거정치에 몸과 돈을 대는 주체로 전락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의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이 민주노동당의 당원으로 가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선출 부정투표’는 바로 민주노조운동의 조합원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 1960년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던 4.19항쟁도 그저 역사 속에 박제화된 유물에 불과하단 말인가.
민주노조운동의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은 정파적 혹은 종파적 메카니즘으로 작동되고 있는 각종 선거정치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민주노조운동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은 통합진보당의 막장드라마를 시청만하는 시청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곧 연출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저 막장드라마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통합진보당을 혁신시키겠다는 결정 또한 ‘멍때림’의 극치다. 자신 스스로 혁신의 주체인지 혹은 혁신의 대상인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머∼엉’인 것이다. 부정을 보고도 분노하지 못하는 ‘머∼엉’이자, 지도부나 간부들의 관료주의적 권력 앞에서 말 한 마디 못하는 ‘머∼엉’이다. 주인 행세를 해야 할 때,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 ‘머∼엉’이다. 정말 어렵고 힘들게 싸우고 있는 동지들을 보고도 눈을 감아 버리거나 혀를 끌끌 차는 ‘머∼엉’이다. 국가와 자본이 노동자들을 새롭게 탄압하고 있는 각종의 도구, 특히 손해배상청구제도, 복수노조제도, 타임오프제도 등에 투쟁으로 넘어서려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보는 ‘머 ∼엉’이다. 국가와 자본이 비정규직을 제도적으로 양산하려 하는 소위 하도급제도에 대해서도 그저 ‘머∼엉’이다. 민주노조운동의 노동정치는 이미 파산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투쟁정치의 싹을 부여잡고 수 년 동안 싸우고 있는 장기투쟁 사업장의 조합원, 희망버스에 몸을 싣고 투쟁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조합원, 그리고 바다 건너 제주도 강정마을까지 달려가는 조합원들이 있다. 이러한 조합원들은 온 몸으로 노동정치를 실현하고 있다. 이미 파산해버린 노동정치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몸짓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조합원과 활동가들을 부르고 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머∼엉’하니 있기보다 주변으로 몸과 마음을 돌리고 함께하는 순간, 노동자들의 희망은 광채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바로 노동정치다. 민주노조운동은 보석 같은 노동현장 및 생활현장의 투쟁정치를 하나로 꿰어내는 투쟁전략으로 노동정치를 재구성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