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금융노조 파업과 '금융민주화'의 길
금융노조 파업과 ‘금융민주화’의 길
- 저축을 유도하는 은행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상동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자문위원
7월 30일 금융노조가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전국의 시중은행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금융노조의 파업은 IMF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노조는 이번 파업의 중요 목표를 은행의 사회 공공성 강화에 두고 있다. 임기말에 들어 선 현 정부가 무리하게 금융산업 자유화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잇따라 거대한 은행 자유화, 대형화 조치가 추진되고 있는데 이미 완료된 농협의 금융부문 분리,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민영화, 국내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의 합병 논의 등 하나하나가 거대한 프로젝트이지만 열거하기에 숨가쁠 정도로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추진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경제의 금융화에 있다. 금융시장의 힘이 커지고 다른 경제부문의 금융상품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노동소득과 고용사정이 악화되는 것의 배경에 경제의 금융화가 있기 때문에 노동유연화 저지는 곧바로 금융 신자유주의 저지와 동전의 양면이 되어야 한다. 단언컨대 금융노조의 투쟁없이 금속노조의 투쟁은 성공하지 못한다. 기존의 산업노동 중심의 운동이 금융노동과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금융민주화’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야
선거의 계절을 맞이하여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금융노조의 파업투쟁이 경제민주화에 못지 않게 중요한, 아니 경제민주화만큼이나 중요한 그래서 함께 논의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아직 금융민주화라는 개념은 널리 통용되고 있지 못하다. 올림픽과 청와대의 압박이 있다고는 하나 금융노조의 파업이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이다. 그러나 사실 금융민주화라는 개념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금융 시스템, 특히 제도권의 대형 시중은행이 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하는 방향으로 개조되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금융은 기본적으로 부자들과 금융지식이 많은 자들에게 봉사하고 있다. 사회 자산을 확대하고 널리는 역할은 방기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2008년 금융위기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비교적 생소했던 투자은행 등과 같은 ‘그림자 금융’ 발달과 궤를 같이해 왔다. 사실 현재의 금융위기는 전통적인 은행 모델의 실패라기 보다는 금융 계좌에 포착되지 않는 그림자 금융의 막대한 대출 확대의 실패라고 보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금융 모델,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바로 그 금융 모델은 전통적인 은행 모델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은행 비즈니스 모델에 있다. 투자 은행들은 여러 대출상품들을 증권화하고 묶고(bundled) 시중은행과 국내외의 투자자들에게 팔아 치워 왔다. 금융기관들의 도덕적 해이라는 것도 그림자처럼 눈에 잘 띄이지 않는 형태의 투기가 핵심이지, 최근에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 CD(양도성 예금증서) 금리 조작과 같은 것이 핵심이 아니다. 그리고 투자은행은 무슨 별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기존의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상업은행과 다른 형태로 그들 자신을 디자인한 것에 불과하다.
금융민주화를 금융규제 확대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고삐풀린 괴물’을 붙잡아 두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규제 그 자체가 신자유주의 은행 시스템 모델의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수익성에 몰두하고 빠르게 대형화되는 은행들의 변화 속도를 규제가 쫓아가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따라가기도 힘든데 은행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사전에 예방하는 규제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민중들의 은행
오래 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금융민주화 운동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은행을 민주화시키기 위한 실로 역사적인 많은 운동들이 있었고 대표적인 것이 19세기 초의 영국 저축은행 운동이다.
당시 박애주의적인 운동가들이 중심이 된 이 운동은 저소득자들이 은행에 저축할 동기와 인센티브를 제공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초 영국은 사회운동이 시작되는 것을 목격한 역사적 시대였다. 이후 미국과 독일, 스위스에 비슷한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시간을 한참 지나 20세기 초에 들어서면 영국에서 우체국 저축은행이 만들어진다. 우체국 저축은행은 전국에 퍼져 있는 우체국을 통해 저소득자들이 저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우체국 저축은행은 은행 자신만의 조직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는 기관이다.
20세기 후반이 되면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과 같은 모델이 새롭게 떠오른다. 그라민 은행은 저축이 아니라 대출사업을 중심에 두고 있어 위험성이 있지만 저소득자들이 “경제적 위험을 극복할 능력을 키우는 것, 공동체의 역량을 키우는 것, 그리고 (신용점수와 같은 공식적인 신용이 아니라) 비공식적 신용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현재의 은행 시스템은 기초 서비스의 부재 때문에 저소득 가계가 저축을 할 방법 자체를 찾기 힘들게 만들어 놓았다. 저소득 노동자들이 중요한 기술을 획득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들의 아이들이 대학을 가고 미래를 설계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는 은행 서비스가 사회 전체의 최대한의 범위에 제공되는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특히 그곳은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은 곳, 고용과 노동이 압박받고 있는 곳이어야 한다. 금융민주화의 길은 더디고 오래 가는 길이 될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저축은행 운동이 21세기 한국에서 재현되는 것을 꿈꾸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