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희망은 도처에 널려있지 않은가
금속노조연구원 |
2012.11.12 00:00
희망은 도처에 널려있지 않은가
- 지자체 사업의 일단을 돌아본 단상 -
정일부 한국노동운동연구소 부소장
사실은...
사실은 그랬다.
올해 초 시청내 사회적기업지원센터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다소 머뭇거렸지만, 결국 연구용역 형식으로라도 하기로 한 것은 두 가지 궁금함 때문이었다.
지역운동이 중요하다는 생각 하에, 무엇보다도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내 자영업자·영세기업에 대한 관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 또 하나는 현재 시정을 집행하고 있는 민주당 출신 시장체제에 대한 궁금함 때문이었다. 노동조합 하는 우리들과 생각과 노선은 다르지만, 그들도 당연히 노동조합 하는 사람들처럼 성실하고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을까? 그들은 공무를 담당한 사람이니까 시민들을 위해 얼마간 자기희생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것이 궁금했다. 보통 동네가 그렇듯,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면 시정 집행자들 중에 아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 지금 민주당 옷을 입고 일하고 있지만 우리 시의 시장과 주요 관계자들 역시 오래 전에 지역에서 노동운동할 때부터 알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적기업을 둘러싼 현실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힘들여 추진하고 있는 사회적기업과 마을만들기 사업들. 그러나 이를 둘러싼 현실은 많은 영역에서 실망스러움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기업 발굴·육성이 지역사회 커뮤니티를 형성·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라 하면서도 민관의 대등한 거버넌스를 이루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전히 사회적 가치보다 사업지원금을 중심으로 제반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말로만 자립성을 이야기할 뿐, 관에 의존적인 시스템을 양산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진행되고 있는 지원사업의 대부분이 의례적이거나 형식적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정작 사회적기업들은, 소위 쎄가 빠지게 일해도 수익을 내기 힘든 현실인데 지원하는 내용은 없이 지원금만 애먼 데로 새나가고 있다며, 그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많은 사회적기업가들이 고용노동부가 이 사업을 담당하고 있어 문제라 지적하는 것을 보면서, 고용노동부는 우리 노동자들 원한만 사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였다.
그래도 사회적기업들을 인큐베이팅 하는 작업은 나름 재미있는 과정이었다. 아기를 키우고 있는 주부 초년생들의 협동조합 추진모임, 야구리그를 만들어 지역 내 불우아동을 돕겠다고 나선 건강한 청년들의 의욕적인 사업 추진, 지역 내 위기청소년들에게 힘을 넣어주려 노력하고 있는 젊은 대안교사들의 헌신적인 활동, 출발은 주식회사 형태로 시작했지만 어떻게든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마을버스 등 지역주민들이 제각각 사회적기업 혹은 협동조합을 만들어가는 과정들은 신선한 활동이었다. 게다가 지자체조례 개정운동, 좋은예산 만들기운동 등 아직까지는 활발하지 않지만 관심 있는 시민들부터라도 하나둘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또 다른 의미 있는 일이었다.
민주당스러운 모습들
그러나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사업과정에서 관과의 관계는 한마디로 실망과 분노의 연속이었다.
노동조합이나 그 상급단체에서 일하는 것과 비교할 때 행정기관의 사업내용이 결코 충실하거나 발전적인 것이 아니었다. 생각 차이나 노선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의 기본이 그랬다. 인정할 만한 것을 굳이 찾는다면, 관리 차원에서 책임질 일이 없게 꼼꼼하게 따진다는 것. 실력이 없다면 시의 공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시민들에 대한 서비스정신이라도 갖추어야 할 텐데,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자세가 일반적이었고 그나마 덜 나쁜 사례를 찾는다면 자기 업무에만 빠져 시민의 요구가 무엇인지 관심 없어 하는 모습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어찌 보면 이건 애초에 예상했던 것일 수 있다.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조작과 은폐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 예로, 사회적기업들을 발굴·육성하는 사업은 공모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거기에 시민들이 팀을 이루어 참여하고 그 팀들 중에서 심사를 거쳐 사회적기업을 선정한다. 이렇게 사회적기업들을 발굴·육성하는 사업에서 행정기관의 행태는 복마전 같은 모습이었다. 심사하기 전에 시의회 주요관계자가 잘 봐달라는 전화를 하고, 슈스케나 위탄처럼 공개심사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있는 대로 발표해야 할 심사위원회가 점수를 조작하고, 시민들 피해를 막기 위해 지적하는 데 대해 관련 자료를 없애라고 오히려 은폐를 지시하는 등... 사업지원금이 걸려있지 않는 심사에서조차 이러는데, 거액이 오가는 각종 사업과정들이 어떨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지자체들이 다 같지는 않겠지만 기초단체장 공약이행 최우수상, 매니페스토 경진대회 우수상, 일자리창출분야 최우수상들을 수상한 지자체가 이러하다면, 다른 지자체들 역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지 않을까? 그런 부정·비리는 공무원들이 한 일이고 정무직에 있는 민주당 사람이 한 게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무원들을 관리·통제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그런 행태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면, 그 역시 무능하다는 비판을 비껴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민주당스러운 사람들의 활동을 보면 공무원들처럼 군림하거나 복지부동하지는 않는 모습이다. 시민들 앞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싹싹하고 열심히 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중요한 자리에는 자기 가까운 사람 심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모습들이다. 결국 단지 무능해서 공무원들을 제대로 관리 못하는 게 아니라, 보이는 모양만 다를 뿐 한통속이었던 것이다.
남는 것은...
이런 현실을 확인하면서 남는 것은, 무엇보다도 슬픔이었다.
지자체를 집행하고 있는 집단들이 저 정도인 걸 보면 진보정치나 노동정치 하는 사람들이 집권해서 못할 일도 아닌데,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자괴감. 물론 저들의 행태를 보면서 우리가 집권하면 더 잘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저들처럼 뿌리없는 선거활동으로 치달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자괴감이 해소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 그렇다고 민주당스러운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저런 무능과 부정에 대해 개인적으로라도 싸우자니, 지역 내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진보정당이나 노동단체가 없는 조건에서 결국 시정 담당자와의 싸움결과가 새누리당만 이롭게 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지역상황까지. 그러니, 나서기엔 찝찝하고 가만히 있자니 답답한...
무엇보다 큰 슬픔은, 진보정치야 저 모양이라 쳐도, 지역에서 노동쪽이 뭐라도 해야 할 텐데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손에 잡히지 않는 공허함이다.
항상 열심히 살고 조그만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려 하는 게 노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부당한 것에 반대하고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알지만, 딱 거기까지 아닌가? 민주적인 지역사회를 위해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공동체형성을 위해 우리 노동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닥 희망적인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이 나만의 느낌일까?
대선과정에 여러 활동가들이 문·안 캠프로 가고 있지만, 그들을 욕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지금까지 노동자정치세력화에 거품이 벗겨지는 것일 뿐, 크게 보면 가는 사람이나 가지 않는 사람이나 노동의 주체들 속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노동의 주체 속에서 지역사회 발전의 희망을 찾기가 힘들다면 결국 민주당스럽게 자기 잇속들 챙겨가면서 아주 조금씩 변화해가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일까? 인류역사에 아주 가끔 혁명이란 게 있긴 했지만 그것도 실패한 것일 뿐, 역사발전 자체가 원래 그런 정도라 봐야 하는 걸까? 철인정치는 그저 이상일 뿐 현실은 그냥 현실일 뿐인가?
함께 존중하며 살아가는 민주적인 지역사회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공동체의 형성, 그 희망은 어디에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우리들 노동자의 능력은 어디에 내놓더라도 부족하지 않고, 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어질러진 방구석처럼 할 일이 널려있는데 말이다.
이런 희망은 불가능할까?
동네에서 십 수년째 조그만 상점을 하고 있는 곳이 있는데, 건물 주인이 그 자리에 자기 아들 장사를 시키려 하니 나가라 한단다. 이제 상점 주인은 손해를 보면서 쫓겨날 판.
그런데 상점을 애용하던 동네 주민들이 저마다 찾아와서는 한 마디씩 하는 말씀이, 어떤 주민들은 ‘이게 우리 좋자고 하는 말이지만, 여기 이 상점 없어지면 우린 다들 힘들어지니 어떻게든 자리를 지켜달라’ 하시고, 옆에서 다른 상점하시는 분들은 ‘여기서 쫓겨나면 저기 옆에 월세 싼 데 알아봐줄까’ 그러고, 또 어느 꼬부랑 할머니께서는 ‘내가 늙도록 죽지 않아서 이렇게 못 볼 걸 본다’면서 탄식하시고, 말은 잘 안 통하지만 점점 많이 찾아온다는 이주노동자들도 이곳 상점에 대한 아쉬움은 마찬가지일 터.
이렇게 조그만 상점 하나 문 닫는 것에도 온 동네 주민이 아쉬워하는 것은 상점 주인과 동네 주민들이 서로 존중하고 아끼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인 면에서도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에게 생활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런 풀뿌리들이 희망 아닐까? 이렇게, 분명 우리 주변에는 희망들이 살아있지 않은가.
물론 동네의 조그만 생활공동체가 어디로 나아가려는 것인지,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지가 중요할 수 있다. 우리 사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고 따라서 계급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을 중심으로 식생활·주거·의료·교육·문화 등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것이 삶의 문제로 생활에서 모아지고 행동할 때 의미가 있지 않을까?
결국, 개별적이고 조그만 이런 희망들을 어떻게 조직적으로 발굴하고 육성해내느냐가 과제 아닐까? 그것은 곧, 조직된 노동자와 동네의 풀뿌리 희망들이 함께 존중하고 서로를 엮어가는 일이 아닐까? 그래서 사회·문화·정치·경제적인 차원에서 공동체를 형성·발전해가는 것, 아니 그냥 간단히 말해 자기 사는 곳에서 삶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희망을 일구어내는 지름길 아닐까?
우리 자식들을 위해 이런 희망을 갖는 것이, 지금의 노동주체들에게 불가능한 일일까...
*이 칼럼은 한국노동운동연구소와 연계하여 작성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