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꿈꾸는 ‘뻔뻔함’을 넘어서자
김영수 /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자문위원
참으로 뻔뻔한 글이다. 저자가 자신의 책에 대해 칼럼을 쓰는 것 자체가 그렇다. 칼럼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난 이후, 칼럼에서 책을 선전해야 할지, 아니면 비판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그러나 이 뻔뻔한 저자는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치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기간 내내 바보처럼 읊조려 왔던 말을 이번 기회에 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
이 바보는 소위 386세대들에게 묻고 싶다. 필자도 속하는 386세대들이 어느덧 기성세대로 자리를 잡고 있고, 후속 세대들로부터 ‘꼰대’라는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다. 우리네들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주인이었다는 열정적 추억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추억의 힘을 내세워 민주화의 과실만을 따먹는 또 다른 기득권을 누리는 것은 아닌가. 너와 내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물론 이 바보는 질문을 하면서도 그 답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은 이미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힘조차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바보는 가끔 나의 젊음, 아니 격랑을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과 삶의 조건이 변화되는 과정을 돌아보면서 ‘빠름’에 중독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1987년 독재의 어둠에서 벗어난 우리네들은 소위 1990년 전후로 3저(저유가, 저금리, 저달러) 호황과 민주화의 콩고물을 맛보다가, 199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자본의 생산(노동)유연화 전략의 울타리에 갇히고, 1997년 IMF 외환위기의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시기별 특성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는 이 순간에도, 참으로 숨이 가빠온다. 삶의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은 버거움의 연속이다. 온 몸이 저려오는 느낌이다. 우리네들은 삶의 토대를 수시로 뒤흔드는 자본과 국가의 빠른 장단에 맞추어 춤을 멈출 수 없는 광대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런 빠름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단순했다. 삶 자체를 위해 온 몸으로 투쟁하든지, 아니면 자본에게 피와 땀을 바치든지, 양자택일이 연속되는 삶은 우리네들에게 ‘빠름’을 강요하였다. 빨리 선택하거나 빨리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체화되었다. 삶의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 자본과 국가의 전략이기도 했다. 여유를 가지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사유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관계도 정말 단순해졌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그것을 위한 돈이면 그만이었다. 이제 우리네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삶 조건의 ‘앙상함’과 사유의 ‘빈곤함’뿐이다.
이러한 양상은 ‘민주주의의 질식’이라는 정치의 참혹함을 가져왔다. 민주주의 이행은 정치권력의 변화와 함께 국가권력의 민주화를 일궈가는 ‘민’의 역사적 여정이다. 그 끝이 쉽게 보이지 않더라도 너와 내가 원하는 지점이다. 그 곳은 사막의 오아시스이기도 하다. 우리네들이 진보정치와 계급정치의 꿈을 먹는 이유도 아마 그것일 것이다.
그런데 너와 나는 이미 바보가 되었다. 진보정치와 계급정치에 대한 꿈을 꾼 이상,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네들은 정치권력의 교체와 민주주의를 일치시키거나 혹은 자신의 권리가 실제로 투영되는 국가권력의 상과 내용을 사유하지 않은 채, 교체된 정치권력의 과실만을 따 먹으려 하였다. 정치란 ‘돈’을 가져다주어야 하는 것으로 체화되었고, 지역개발을 이루어내는 것이 최고라고 여겨졌으며,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에게 투표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힘없고 무지한 민은 그저 권력자의 처분만을 기다리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의 힘을 빌려 해결해 나가면 그만이었다. 민들이 실제로 정치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었고, 스스로 정치의 기본기를 다질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정당이나 정치인들에게는 자만심만이 존재하고, 민에게는 비굴함만이 남았다. 이러한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는 민에게 ‘삶의 자존감’을 부여해야 한다.
진보정치와 계급정치가 대중들에게 고립되어 위기에 빠졌다고 말하지 말자. 너와 나의 사유가 앙상해지고 빈곤해진 순간부터 이미 진보정치와 계급정치는 위기에 빠져버렸다. 진보정치와 계급정치는 정치권력의 교체를 넘어선 민주주의를 사유하고 상상해야만 그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바보는 지난 3월 그 실체를 위해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알렙, 2016)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물론 이 책은 우호적인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나 문장에 사용되는 단어들이 무겁고 생경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권리의 실체를 역사적 측면-철학적 측면-정치권력의 측면-미래 대안사회의 측면 등과 같이 다차원적으로 드러내다 보니, 독자들에게 독해하기 위해 사유해야만 하는 집중력을 요구하고 있단다.’ 바보는 이런 비판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책은 민주주의의 본질과 현상을 ‘민의 권리’로 사유하고 상상하면서,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현상에 대해 ‘왜’라는 질문과 답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저자의 뻔뻔함이다. 정말 이 바보는 사유하지 않거나 상상력을 포기한 상태에서는 민주주의를 꿈꾸거나 희망을 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저 정치권력의 교체를 위해 투표만 잘하자고 권하면 될 터이니 말이다.
민주주의는 사회 곳곳에 ‘민’의 권리가 널브러져 있어야 한다. 농사꾼이나 노동자가 자신의 일에 대해 떳떳한 자신감으로 충만해지고, 뻣뻣하게 고개를 세워서 자신의 권리로 정치권력이나 국가권력을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민’이 ‘삶터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터의 주인’으로 부활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회가 바로 정치는 생활화되고, 권리의 실현이 일상화된 이상사회의 민주주의이다. 이제는 더 이상 이상사회를 사유하지도 않고 또는 상상하지도 않으면서 진보정치와 계급정치를 꿈꾸는 뻔뻔함에서 벗어나보자.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는 바보들에게 상상의 끝이 무엇이고, 그 상상을 국가권력으로 체계화한 논리의 무한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여러 바보들에게 저자 스스로 일독을 권하는 뻔뻔함이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