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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는 왜 점점 더 심화되는가?

금속노조연구원   |  

이문호 / 워크인연구소 소장

스티글리츠는 그의 저서 불평등의 대가에서 작금의 (미국)사회를 1:99의 사회로 진단한다. 그리고 묻는다. “11표를 근간으로 한다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위 1퍼센트는 어떻게 해서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형성하는데 성공한 것일까?”

11표의 민주적 원칙이 지켜지고 있음에도 99퍼센트가 아닌 1퍼센트가 지속적으로 막대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탄식에 가까운 문제제기다. 왜 민주사회에서조차 99퍼센트는 1퍼센트에 지는 것일까? 99퍼센트는 도대체 어디에 투표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는 여기서 프레이밍’(framing)에 대해 지적한다. 인간은 사회적 현상을 모두가 똑같이 인식하지는 않는다. 같은 현상을 두고도 혹자는 부정적, 혹자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이는 사고의 프레이밍이 있기 때문인데, 프레이밍이란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우리의 인식의 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뜻한다. 인식의 틀이 다르면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는 눈도 다르고 행동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광고도 상품에 대한 프레이밍이라 할 수 있다. 물건을 많이 팔기 위해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형성하려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이 프레이밍의 개념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의 틀은 상위 1퍼센트가 조작하고, 나머지 99퍼센트는 이에 현혹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상위 1퍼센트는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연구결과를 수없이 쏟아내고, 정책을 개발하고 홍보한다. 언론은 온통 그들의 선전장으로 변한지 오래다. 그들은 이를 통해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 물리적 수단을 통해 강제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이념에 스스로 동화되어 그 사회구조가 민주적으로정당화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불평등은 능력과 사회적 기여, 열심히 일한 대가로 주어지는 정당한 보상에 따른 자연적인결과로 인식된다. 그리고 부자 1퍼센트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정책으로 그들의 투자를 막기보다는 그들의 돈을 끌어낼 수 있도록 그들이 원하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에 더 많은 도움이 된다는 이데올로기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결국 99퍼센트는 이러한 조작된 프레이밍에 속아 1퍼센트를 위한 정당과 정책을 지지하게 되며, 1:99의 사회는 점점 더 심화된다.

민주사회에서 양극화의 문제는 분명 프레이밍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물리적 강제가 아닌 선거에 의해 정당과 정책이 선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99퍼센트가 다가올 수 있는 프레이밍을 열심히 만들고, 치열하게 소통해 나가야 한다. “정책전쟁은 인식전쟁이다라는 스티글리츠의 외침도 그러한 뜻이었으리라.

그런데 과연 99퍼센트는 그들의 프레이밍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 만들고 싶어 할까? 프레이밍을 만드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여기에 있어 보인다. 사실 우리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99퍼센트를 위한 많은 이론과 연구와 정책들이 있었음을 잘 안다. 또한 우리는 99퍼센트를 대변하는 조직과 정당도 갖고 있다. 그럼에도 그 정책과 정당을 99퍼센트는 외면한다. 프레이밍을 만들어도 그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

뜻밖에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한 정부 관료의 돼지망언 속에 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민중을 개돼지로 일컫는 그의 말에 기자는 묻는다. “지금 말하는 민중은 누구냐?” 그는 “99%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질문과 대답이 이어진다. “1% 99% 할 때 그 99%?” “그렇다.” “기획관은 어디 속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1%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어차피 다 평등할 수는 없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 그렇구나! 사람들은 99퍼센트에 있으려 하지 않고 1퍼센트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구나! 그렇다면 99퍼센트의 프레이밍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집단에서 벗어나 메이저리그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사회적 연대는 없다. 더 높은 곳을 향한 경쟁만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이기는 방법만을 배우고 싶어할 터인데,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사회적 연대!

실제로 1퍼센트로 올라서는 것이 최고의 사회적 가치가 된지는 오래다. 아니 어쩌면 인류사회가 탄생하면서 그래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루소는 문명사회가 불평등을 야기했다고 비판하면서, 자연 상태에 있었던 인간의 자유와 선한 본성을 찾기 위해 평생 노력했던가.

어쨌거나 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1퍼센트에 올라간 사람들을 찬양하고 있는지. 그들이 걸은 고난의 길과 각고의 노력을 그린 책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그 책을 읽고 감동하고 1퍼센트에 올라갈 야망을 키우고 있는지. 결국 기껏해야 1퍼센트만이 올라가고 99퍼센트는 그대로 미끄러져 남을 텐데도.

가만히 보면 1퍼센트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그들의 능력과 각고의 노력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개중에는 그러한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금수저의 덕택인 성 싶다. 최근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던 피게티의 ‘21세기 자본이 말하는 것도 이것 아닌가. 자본소득이 노동소득보다 훨씬 크다는 것, 즉 이자, 임대료, 상속 등에 의해 얻는 소득이 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보다 훨씬 빠르고 많다는 것 아닌가.

평등보다는 불평등이 좀 더 열심히 일하려는 인간의 노동 동기를 자극하고, 이것이 전체 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설이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를 바란다면 정말 노력한 사람이 잘사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금수저의 요행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한 사람만이 잘사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난해한, 이념적인 표현으로 프레이밍할 필요 없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겠는가.

근대 계몽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 세상은 모두 하느님의 피조물이자 인류에게 준 공유물인데, 어떻게 사유재산이 생길 수 있을까? 여기서 그는 노동을 내세운다.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신체에 대해서만큼은 소유권을 갖는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노동은 그의 생명과 신체가 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노동의 결과는 그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일한 만큼의 소유는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이며, 노동을 통해서만 재산을 모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볼 때 현대사회는 노동이 중심이 되어 발전된 사회다. 그러나 지금 노동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1;99의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1퍼센트는 그들의 프레이밍을 더욱 공고히 구축해 나가고, 99퍼센트는 여기에 현혹되거나 1퍼센트에 올라가려는 헛된 야망으로 사회적 연대를 외면하고 있다. 이로 인한 대가는 혹독하다. 경쟁과 아귀다툼, 분노와 좌절, 갈등과 폭력은 이제 도를 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할까?

1:99의 사회적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양극화는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 우리는 먼저 1퍼센트에 들어가려는 헛된 꿈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자연히 그 1퍼센트는 힘을 잃고. 그들을 위한 프레이밍도 소멸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99퍼센트가 연대하면 선거도 이길 것이고, 노력하고 일하는 사람이 잘사는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이 또한 헛된 꿈일까? 어쨌거나 현대사회의 태동과 발전은 전통사회의 신분적 불평등을 철폐하고 노동이 정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