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고 앙상한 노동은 이제 그만!
이제는 한 번쯤은 노동 유토피아를 꿈꾸길 권한다. 워라밸이나 삶의 질을 말이나 글로만 하지 말고, 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사랑하면서 실현해보자. 일상을 메꾸고 있는 관계의 시작과 끝이 ‘노동’이어서 하는 제언이다. 노동을 폄훼하는 세상이 아니라, 노동 속에 삶의 연대가 있고 노동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보편화되는 세상. 심신이 허락할 때까지 노동을 즐기다가 잘 죽자!
노동은 본성과 욕구를 실현해 나가는 천부인권적 수단이자 권리다. 유엔도 노동의 권리를 강조한다. 노동 권리에 대한 유엔(UN)헌장의 내용을 보자. “모든 노동자는 건강, 안전 및 존엄을 존중하는 근로조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최대근로시간의 제한, 일간 및 주간 휴게시간, 연차유급휴가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헌장 제31조 1항, 2항) 유엔헌장은 노동 권리의 이유를 건강, 안전, 존엄에서 찾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 잘 살다가 잘 죽는 꿈을 꾸면서 평생을 지낸다. 누구나 삶을 후회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는 바람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서로 존중하면서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행복하게 살다가 죽고자 하는 욕망이 곧 죽을 때까지 누려야 할 노동 권리라는 것이다.
8월 25일,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지부는 2023년 단체교섭 결렬에 따른 쟁의행위 찬・반 투표 결과를 발표하였다. 재적인원 44,538명 중 43,166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39,608명(찬성률 91.76%)노조의 쟁의행위에 찬성하였다. 쟁의행위 찬성률이 대단히 높다. 파업을 비롯한 각종의 쟁의행위를 실제로 실천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현대자동차지부 조합원들이 2023년 단체교섭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현재 만 60세에 퇴직해야 하는 정년을 최장 만 64세로 연장하는 별도의 요구안에 대해 기본급 인상・성과급 및 상여금 지급・각종 수당의 인상 문제 이상으로 큰 관심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공무원노동자들의 정년이 만 60세, 각종 공기업이나 정부출연기관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정년이 만 60세, 교사노동자들의 정년이 만 62세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정년을 연장하는 투쟁은 유엔헌장의 가치인 삶의 건강과 안전과 존엄이라는 측면에서 존중되고 장려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퇴직 이후 국민연금만으로 노후생활을 해야 할 경우, 국민연금 지급 시기가 만 63세에서 만 65세로 연기된다는 것은 경제적 수입의 공백기가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지부 조합원이 요구하는 정년 연장은 2023년 1월부터 논의하고 있는 고령자 계속고용(재고용, 정년 연장, 정년 폐지 등)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정부의 사회적 논의와 궤를 같이 한다.(제4차 고령자 고용촉진 기본계획, 2023.1) 물론 정부와 기업은 고숙련 고령 노동자들을 저임금 고용 유연화 방식으로 계속 고용하려 할 것이고, 노동자들은 연장된 정년의 보장과 숙련에 상응하는 임금의 보장을 요구할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계속고용정책에 대한 기업의 인식조사에서도 잘 드러났다. 2023년 7월 전국 30인 이상 1,047개사(응답 기업 기준)의 관리자급 이상을 대상으로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하여 조사한 「고령자 계속고용정책에 대한 기업 인식조사 결과」(2023년 4월~6월 조사)에 따르면, 조사 결과 응답 기업의 67.9%가 재고용 방식으로 고령노령자를 계속 고용하겠다고 하였고, 66.4%가 정년에 도달한 고령 노동자의 전문성을 활용하기 위해 계속 고용을 원한다고 밝혔다. 물론 기업들은 계속 고용의 전제 조건으로 ‘임금유연성 확보를 위한 취업규칙 변경 절차 개선’, 인력운영 유연성 강화를 위한 파견·기간제법 개선, 계속 고용에 대한 정책적 지원 등을 내세웠다.
고령 노동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노동할 필요성이 있다는 지점에 대해서는 노동조합과 정부와 기업이 사회적 동의를 모색하기 위한 공론장을 열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은 생활의 안전과 건강을 보장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보장하는 노동의 권리를 확장해야 하고, 초고령 사회에 조응하는 평생 노동의 권리와 의무가 절대적으로 보장되고 존중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동의를 위해서라도 사회적 의제로 제기되는 핵심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의제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조건이나 고용조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계속 고용의 방안을 정부와 기업의 구상대로 제도화한다면, 계속 고용은 또 다른 비정규 노동자의 양산에 불과하다. 행복하고 존중받는 노동이 아니라, 처절하고 앙상한 노동만 범람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모두가 꿈을 꿀 수 있는 이상사회는 죽을 때까지 노동이 즐거운 사회다. 그리스 헌법은 노동이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가난과 강탈은 사람들을 멍청하고 복종을 잘하게 만들며, 반란의 기운을 억눌러 버린다. 그래서 모두가 농사를 짓는 노동을 하고, 부는 소수에게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골고루 전이되어야 한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전에 세 시간, 점심 두 시간, 오후 세 시간의 노동을 하고, 그 이외의 시간은 자유롭다.’
노동이야말로 개인의 자산이 아니라 사회적인 공공 자산이다. 삶의 본성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행위이지만, 이러한 행위들의 모이고 모여서 사회의 자산이 만들어진다. 노동이 공공재이자 사회의 공공자산이라는 사실을 사랑한다면, 노동의 자부심과 자존감이 보편화되어 노동과 삶의 ‘격’을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게 할 수 있다. ‘노동’이라는 사회적 자산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사회 시스템은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