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의 집권, 영국 노동당의 좌클릭 노동정책
영국 노동당이 14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7월 4일 치러진 총선에서 노동당은 412석을 획득하며 압승을 거뒀고, 보수당은 121석으로 역사상 최저 의석수를 기록했다. 이는 영국 국민들이 보수당의 실정에 등을 돌린 결과로, 노동자들의 권리 회복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것이다.
노동당의 승리는 보수당의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도, 코로나19 대응 실패, 경제 정책 실패 등이 주요 원인이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의 중도 실용주의 노선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노동당 내 좌파 세력의 우려를 낳고 있다. 스타머의 중도 노선은 선거 승리에는 효과적이었으나, 노동자의 권리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할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의 접근 방식이 과거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을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따라서 앞으로 스타머가 어떻게 노동자의 권익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면서도 중도층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노동당의 실용주의에 대한 중앙일보의 오해
중도파 키어 스타머의 집권에서 대해서 한국 중앙일보 사설은 “중도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한 노동당의 재집권은 한국의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배워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라며 한국 민주당이 국익과 민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고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민주당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고 이 사설을 게재한 중앙일보의 말대로라면 영국 노동당의 노동 공약은 국익과 민심에 반응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고 이런 정책을 한국에서도 펼쳐야 한다는 논리도 성립하므로 여기서는 노동당의 공약을 소개하고자 한다.
노동당은 “일한 만큼 보상받는 사회를 위한 노동당의 비전(Labour’s Plan to Make Work Pay)”을 통해 진보적 노동정책 개혁을 약속했다. 주요 내용은 △불안정 고용 종식, △공정한 임금, △가족 친화적 권리, △노동자의 발언권 강화(노동조합 관련 법률 현대화, 단체교섭권 강화), △직장 내 평등 증진, △노동권 집행 강화, △ 공공조달 개혁 등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정책은 ‘착취적 제로시간 계약 금지(Zero hours contarcts and one-sided flexibility)’와 ‘해고 후 재고용(Fire and Rehire)’ 관행 종식이다. 제로시간 계약은 2000년대 이후 서비스업종에서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데 근로시간을 보장하지 않는 계약 형태로 노동자들을 극도의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한다. 해고 후 재고용 관행은 근로조건 악화를 위해 악용되는 경우가 많아 노동계(TUC)의 강력한 비판을 받아왔다. 노동당의 이러한 정책은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중요한 진전이다.
영국 노동조합총연맹(TUC)은 노동당의 정책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TUC 사무총장 폴 노박은 "노동당의 정책은 수백만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TUC는 단체교섭권 강화, 제로시간 계약 규제, 최저임금 인상 등의 정책을 환영하면서, 이러한 개혁이 "공정한 노동시장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노동당은 또한 고용 첫날부터의 기본권 보장을 약속했다. 현재 영국에서는 일부 노동자 권리가 고용 기간에 따라 달라지는데, 노동당은 이를 개선하여 모든 근로자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려 한다. 이는 노동자 보호를 대폭 강화하는 진보적 정책이다.
플랫폼 노동자를 포함하는 노동법 개정 모색
단일 근로자 지위 도입 검토는 노동당의 중요한 정책 중 하나다. 현재의 복잡한 고용 지위 체계를 단순화하여 더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다. 이는 특히 긱(Geek) 이코노미 종사자들의 권리 보호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영국의 현행 노동법 체계는 'employee'(피고용인), 'worker'(근로자), 'self-employed'(자영업자)의 3단계로 구분되어 있다. 이 중 'employee'는 가장 강력한 법적 보호를 받지만, 'worker'는 일부 권리만을 보장받으며, 'self-employed'는 대부분의 노동법 보호에서 제외된다. 이러한 구분은 현대의 다양한 고용 형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플랫폼 노동자나 프리랜서 등 비정형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2017년 발표된 테일러 보고서(Taylor Review)는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고용 지위의 명확화와 근로자 권리 보호 강화를 권고했다. 노동당의 단일 근로자 지위 도입 검토는 이 보고서의 제안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당이 제안하는 단일 근로자 지위는 현재의 'employee'와 'worker' 범주를 통합하여 하나의 근로자 지위로 일원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현재 'worker' 지위에 있는 노동자들도 'employee'와 동등한 수준의 권리와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부당해고로부터의 보호, 유급 휴가, 병가, 육아휴직 등의 권리가 포함된다. 현재 많은 플랫폼 기업들이 자신들의 노동자를 'self-employed'로 분류하여 노동법상의 의무를 회피하고 있는데, 단일 근로자 지위가 도입되면 이들도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는 여러 과제가 따른다. 우선 '진정한 자영업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또한 고용 형태의 유연성을 선호하는 일부 노동자들의 이해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세금 문제도 중요한 이슈다. 현재 'worker'들 중 많은 이들이 세금 목적으로는 자영업자로 취급되는데, 단일 지위 도입 시 이들의 세금 지위가 어떻게 변할지도 논의가 필요하다고 전해진다.
영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의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본법" 제정 논의와 맥을 같이 한다. 양국 모두 변화하는 노동 환경에서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사례는 한국에도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 양국의 정책 변화와 그 효과를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여성과 가족친화적 정책 확대
영국 노동당의 가족친화적 노동권 정책은 현대 사회의 변화와 요구를 반영한 중요한 의제다. 저출산 고령화, 여성의 경력 단절 방지, 일-생활 균형에 대한 요구 증가, 정신 건강 문제 대응 등이 이 정책의 배경이 되고 있다. 주요 정책으로는 첫째, 모든 근로자에게 고용 첫날부터 유연근무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이는 재택근무, 시차출퇴근제, 압축근무주 등 다양한 형태로 적용될 수 있으며, 특히 학기 중 근무시간 조정이 가능한 탄력적 근로시간제 도입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출산 후 6개월간 임산부 해고를 금지하여 모성 보호를 강화한다. 셋째, 육아휴직 제도를 전면 검토하여 근로 가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넷째, 무급이었던 돌봄휴가의 유급화를 검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별 휴가 권리를 모든 근로자에게 부여한다.
영국 노동당의 가족친화적 정책 중 주목할 만한 두 가지는 사별휴가 권리와 폐경 관련 정책이다. 사별휴가 권리는 모든 근로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휴가를 보장하는 정책이다. 현재 영국에서는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만 2주의 유급 휴가가 주어지지만, 노동당은 이를 모든 근로자로 확대하려 한다. 이는 근로자의 정신 건강을 보호하고, 인간적인 직장 문화를 조성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폐경 관련 정책은 여성 근로자들의 특수한 건강 문제를 인식하고 지원하는 혁신적인 접근이다. 노동당은 250명 이상 근로자를 고용한 기업에 '폐경 행동 계획'을 수립하도록 요구할 계획이다. 이 계획에는 유연근무, 온도 조절, 유니폼 조정 등 폐경 증상을 겪는 여성 근로자를 위한 구체적인 지원 방안이 포함된다. 또한 '폐경 차별'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정책들은 단순히 근로조건 개선을 넘어 근로자의 삶 전반을 고려하는 포괄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사별이나 폐경과 같은 개인적 경험이 직장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지원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는 매우 선진적이다. 이는 노동정책이 근로자의 전 생애주기와 다양한 삶의 국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한국의 노동 현장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아직 공론화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별휴가는 대부분 기업의 재량에 맡겨져 있으며, 폐경에 대한 직장 내 이해와 지원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영국 노동당의 이러한 정책은 한국 사회에도 노동자의 삶과 직결된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보다 섬세하고 포용적인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공정 임금 정책도 주목할 만하다. 최저임금을 실질적인 생활임금 수준으로 인상하고, 연령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것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크게 개선할 수 있는 정책이다. 병가 수당 강화, 팁의 공정한 분배 등도 노동자 권익 향상에 기여할 것이다. 노동조합의 권한 강화는 노동당 정책의 핵심이다. 노조 관련 법률 현대화, 단체교섭권 강화, 노조의 직장 접근권 보장 등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권리를 강화하고, 노사 간 힘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실제로 어떻게 시행될지, 그리고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미지수다. 특히 스타머의 중도 노선이 이러한 진보적 정책의 실현을 어떻게 뒷받침할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