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의 혁신, 또?
2000년 금속산업연맹의 정책실장으로 전국을 돌며 간부 및 조합원들에게 기업별노조를 금속 단일노조로 만들자고 역설했었다. 당시만 해도 경험해보지 못했고, 학습도 덜 된 상태라 금속산별(단일)노조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산별로 가면 ‘만사형통’이라며 간부 및 조합원들을 설득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2001년 2월 8일, 금속산별노조가 탄생했다. 필자는 탄생과 동시에 시화공단의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겠다는 꿈을 갖고 금속을 떠나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 시화노동정책연구소를 개소하고, 교육과 상담을 통해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 조직에 나섰었다.
그리고 2008년 필자는 금속노조 정책연구원(현 노동연구원)으로 갔다. 당시 정갑득 위원장의 구상이었던 금속노조 중장기 발전전망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7년 만의 금속노조 귀환이었다. 그 사이 금속노조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동차 완성차노조들의 거부로 4만 조합원으로 출범했던 금속노조는 2006년 그 완성차노조들이 노조를 지부로 명(名)하는데 동의하며 금속노조에 결합, 4만 노조는 15만 노조로 커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외도 후 복귀라 상황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2008년에 필자의 머리 속에 들어온 금속노조는 전체적으로 ‘경제주의, 조합주의’라는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필자는 2012년 말에 노동연구원장을 그만둘 때까지 그 문제를 줄곧 제기했었다. 그 중 대공장의 문제가 핵심이어서 대공장 문제를 파헤치기 시작했고, ‘물량의 덫’에 걸린 대공장이라 표현하며 우려를 표했고, 나름 금속노조의 중장기적 발전을 위해 수렁에 빠진 금속노조, 물량의 덫에 빠진 대공장을 노동운동의 본류로 다시 합류시키기 위한 연구를 했었다. 하지만 필자의 능력의 한계로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노동연구원장 직에 물러나며 필자는 다시 시화공단이 있는 시흥시 정왕동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시화노동정책연구소에서 시화공단 중소영세사업장 및 노동자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시작하였다. 50명 이하 사업장이 전체의 98%수준, 그래서 사업장규모가 10명 수준인 시화공단에서 10만 명 이상(많게는 13만 명, 최근 12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곳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경기도 31개 시․군 중 23위(“2018년 하반기 시흥시 임금노동자 및 비정규직 현황”, 시화노동정책연구소)에 해당한다. 시흥시보다 임금 수준이 못한 시군은 광주시, 양주시, 의정부시, 동두천시, 여주시, 연천군, 포천시, 가평군 등 공단이 없는 소도시 또는 농촌도시이다. 소위 공단이 있는 도시와 비교할 시 시흥시는 최하위에 속한다. 울산시나 여수시, 광양시 등과 비교할 시 이곳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그곳의 2/3에도 못 미친다.
화가 나는 것은 금속과 민주노총이 이곳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속은 반월시화공단 전자업종 노동자 사업을 한다고 사람까지 뽑았으나 딱 거기까지. 사람 뽑아놓고 공단지역에 배치하지 않고 경기지부의 상근자로 사용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더 험한 편. 민주노총 시흥지부를 만들어 10만 명이 넘는 시화공단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나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필자가 민주노총 경기본부와 민주노총에 지부 미설치 이유를 물으니 ‘돈이 없어서’라는 답을 한다. 지부를 설치하면 사무국을 구성해야 하고, 그러면 선임된 사무국 성원에게 임금을 주어야 하는데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민주노총에서 할 소리는 아닌 듯하다. 16개 산별노조에서 올린 의무금은 어디다 쓰기에 10인 규모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지부설치를, 돈이 없어 못한다? 그것도 민주노총 조합원이 100만 명으로 늘었는데? 세상에. 그러니까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의 조합원이 그 수준에 머무는 것이고, 대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조직이지 금속노동자 또는 전체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조직은 아니라는 소릴 듣는 것이다.
아무튼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에 큰 문제를 느끼며 지역사업을 하던 차에 노동연구원 안재원 원장의 ‘소집’을 받았다. 안원장의 ‘소집’ 목적은 ‘금속혁신모델연구’라는 것에 필자를 집어넣기 위함이었다. 안원장 입장에서는 전임 원장에 대한 배려(?) 차원의 소집이고 임무 부여일지 모르나 연구주제를 받아든 필자의 생각은 ‘또 혁신?... 될까?’였다. 왜냐하면 금속노조의 위기에 대한 논의와 나름의 대안들은 필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내놓았지만 거의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여러 사람들이 내놓은 대안들을 제대로 실행해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연구를 하기로 한 경상대 김영수 교수의 ‘우분투’사례를 적용해서 해본다면 이전과는 다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는 일종의 호기심(?)이 발동되어 하기로 했다. 연구가 시작된 지 몇 개월 지났다. 필자는 사무실 책상 앞에 ‘우분투’ - 배려하기, 주인되기, 노동공유, 관계맺기, 휴머니즘, 공동체, 자발성, 연대 – 를 걸어놓고 영감(?)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요새 딜레마에 빠져있다. 왜냐하면 우분투 사례를 적용해서 혁신모델을 개발하려면 금속노조의 가장 큰 부분인 기업지부를 건드려야 하는데 약 13년 전인 2006년 이름 뒤에 붙는 노조를 지부로 바꾸고 금속노조에 결합한 후 이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있는 그 거대한 기업지부를 건드릴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을 혁신 대열에 합류시킬 수 있을까라는 데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금속노조가 처한 문제는 단일성의 약화이다. 역으로 말하면 내부 구성원간 차이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산별역진 현상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 단일성의 약화 문제를 어찌 풀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필자의 고민의 화두는 우분투의 핵심 부분인 ‘배려, 주인되기, 노동공유, 관계맺기, 휴머니즘, 공동체, 자발성, 연대, 권리, 자치’ 등이다. 남아공의 코사투는 우분투를 중요한 철학으로 삼고 당시 남아공을 지배하던 백인정권과 투쟁, 백인 중심사회를 흑인을 중심으로 하지만 백인과도 공존하는 사회로 변모시켰다. 그런데 과연 금속노조는 위의 배려, 연대, 휴머니즘, 연대, 공동체 등등을 일종의 철학으로 삼아 내부 투쟁을 전개, 자신을 변모시킬 수 있을까? 금속노조가 싸워야할 대상에는 거대 기업지부가 있는데, 금속노조가 과연 우분투의 정신을 갖고 투쟁선포를 하고,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물론 코사투는 내부 투쟁을 한 것이 아니고 야만적 백인정권과 투쟁한 것이라서 현재의 금속노조의 내부 투쟁과는 다르지만.
필자의 표현이 마치 코사투처럼 우분투를 내세워 기업지부와 투쟁하자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행여 그런 거라면 과한 것이고, 잘못된 것이기에 필자의 의도를 보다 정확히 해야할 듯 하다.
필자의 정확한 의도는 금속노조 내 가장 큰 세력(조합원의 55% 수준)인 기업지부가 우분투 정신에 근거, 스스로 혁신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지 않으면 혁신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혁신안을 채택하려면 기업지부가 거의 결정권을 갖고 있는 의결단위를 거쳐야하는데, 이는 기업지부가 동참하지 않으면 채택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행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금속노조내 기업지부가 우분투 정신에 근거한 혁신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필자가 고민하는 혁신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그놈의 혁신, 이제 그만해!’라는 비난에 직면할 것이고, 금속노조는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