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라 덴소! 응답하라 덴소!
한국와이퍼(주)는 회사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동차용 와이퍼를 생산하는 제조업체다. 안산 반월공단에 있다. 일본 덴소자본이 100% 출자한 일본계 회사다. 종사자수가 300여명이 넘어 대기업으로 분류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일본계 대기업처럼 보이지만, 최저임금 수준의 여성사업장이다. 2018년 노동조합을 만들어 상여금을 지켜내 그나마 최저 수준은 면하고 있다.
우리가 쓰는 자동차용 와이퍼는 주로 독일 보쉬자본(케이비와이퍼스시템)과 일본 덴소자본(한국와이퍼) 제품들이다. 보쉬자본은 와이퍼를 구동하는 모터, 모터와 암을 연결하는 링케이지, 그리고 우리가 마트에서도 구입할 수 있는 블레이드를 한 공장에서 만든다. 하지만 덴소자본의 와이퍼 생산시스템은 좀 다르다. 핵심부품이라 할 수 있는 모터는 덴소코리아(주) 화성공장에서, 링케이지는 덴소 협력업체인 홍성의 이에이치(주)에서 만든다. 반월공단의 한국와이퍼는 암과 브레이드를 만들어 패키지 형태로 현대기아차 등 완성차에 납품한다. 영업권(완성차를 상대로 수주를 받는 것)은 덴소에서 직접한다. 그러니까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전체 시스템으로 보면 한국와이퍼(주)는 단순 생산조립라인에 불과하다. R&D나 영업, 재무 등 기업의 주요활동은 덴소에서 제어, 통제한다.
1987년에 설립된 한국와이퍼는 90년 초에 일본 NWB(일본와이퍼블레이드)와 기술제휴 하였고, 2000년 이후 일본자본으로 넘어갔다. 일본 NWB는 외환차익을 노리고 2012년 이후 일본 자동차에 들어가는 와이퍼를 한국에서 생산할 계획을 세웠다. 2공장을 설립하고 라인을 더 깔았다. 한국와이퍼는 150명 규모의 중소기업에서 360명이 넘는 대기업으로 탈바꿈했다. 본격적인 일본제품 생산시스템을 갖추기도 전에 엔고현상이 끝났다. 일본 자동차에 와이퍼를 수출하는 계획도 취소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통상임금 이슈가 발생했고, 소송 끝에 회사는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이라고 인정했다. 고용문제와 최저임금 산입범위 문제 등 현장은 뒤숭숭한 상태였고, 2018년 6월에 노조를 설립하였다.
2017년 말부터 한국와이퍼에 신차수주가 끊겼다. 이 상태로면 2024년에 일거리가 없어져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금속노조 한국와이퍼분회(이하․노조)는 회사에 대책 마련과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는 노조에서 요구하는 단종계획서 제출(상황설명)을 거부하고 있다. 교섭자리에서 신차수주를 받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회사는 ‘현대자동차의 저단가수주문제와 경쟁업체의 출혈경쟁 때문’이라고 답했다. 현대자동차가 단가후려치기를 하고 있어서 ‘제품을 만들어 납품 해도 적자이니 아예 수주를 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경쟁사인 ‘보쉬자본의 케이비와이퍼시스템은 자금력을 앞세워 출혈경쟁을 하고, 사세 확장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 문을 닫을 계획이냐, 대책이 무엇이냐’는 물음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노조에서 여러 통로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덴소내에서는 “2024년에 덴소는 와이퍼 사업에서 손을 뗀다”는 이야기가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을 한국와이퍼 경영진만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덴소는 정말로 한국 자동차 와이퍼 생산에서 손을 뗄까? ‘손을 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노조는 여러 증언과 자료, 조사 등을 통해 몇 가지 가설(시나리오)을 세웠다.
첫 번째 가설은 말 그대로 덴소자본이 와이퍼사업을 접는 것이다. 덴소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자율주행, AI와 같은 미래 자동차 분야에 집중투자하고 나머지 사업을 정리하는 시나리오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가설에는 해명되지 않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이 가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완성차인 현대기아차가 ‘부품사 이원화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현대기아차는 부품사 이원화 정책을 포기한 적이 없다. 자동차산업의 특성상 부품 중 하나라도 없으면 자동차가 생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기아차는 공급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부품사 이원화 정책을 실시하거나 이원화가 어려운 경우 직접 관리(생산)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덴소가 아닌 제3의 업체가 등장하면 가능한 가설이나 아직까지 제3의 와이퍼 업체가 나타났다는 정보는 없다. 게다가 덴소는 자율주행이나 AI 등엔 노하우가 없다. 모터, 공조시스템 등이 주력이다.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분야를 버리고 리스크가 큰 새로운 업종으로 전환한다는 것도 쉽사리 납득하기 힘들다.
두 번째는 해외에서 생산, 납품하는 가설이다. 일본 덴소자본은 글로벌기업이다. 해외에 여러 생산기지를 두고 있다. 아시아에도 말레이시아에 와이퍼 생산공장이 있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도 문제가 있다. 비용문제와 품질문제다. 물류비가 아무리 싸졌다고는 하나 와이퍼처럼 저단가의 제품을 해외에서 납품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더 결정적으로는 말레이시아 공장은 여전히 품질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최근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글로벌 체인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 시나리오도 수긍하기 쉽지 않다.
세 번째 가설은 비정규직화다. 현재의 정규직 공장을 비정규직 공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어떻게? 노조에서 주목하는 곳은 이에이치이 주식회사다. 이에이치이 주식회사는 2018년 7월까지는 덴소코리아 홍성공장이었다. 하지만 한 달 후에 덴소코리아 홍성공장은 이에이치이 주식회사로 새롭게 태어났다. 같은 장소에 같은 일을 하는데 회사만 바뀌는 마법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덴소코리아 직영공장이 덴소코리아 협력회사로 바뀌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노조에서 파악한 바로는 불과 한 달사이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이런 마법을 부리기 위해 덴소는 오래전부터 작업(준비)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 멀쩡하던 정규직 공장이 비정규직에 가까운 협력업체로 바뀌기까지는 덴소코리아 홍성공장 노조가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덴소는 홍성사례 뿐만 아니라 한국내 공장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도 (불법적으로 보이는) 사내 하도급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덴소는 물리적(폭력적)이고 단기간의 방식보다는 장기간의 고사 작전을 통하여 최대한 잡음없이 조용히 일처리하는 스타일 인 듯하다. 한국와이퍼도 2018년부터 2024년까지 6년의 시간을 들여 천천히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노조는 덴소가 홍성에서 재미를 보았던 마법을 한국와이퍼에도 부리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정규직을 노조도 없는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삼원화 되어 있는 생산시스템을 하나로 만들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다.
이 시나리오대로 하려면 완성차인 현대기아차의 협조(묵인, 협력)가 없으면 안 된다. 이미 양재동(현대기아차 본사가 있는 양재동에서 주요한 정책적 결정이 이루어진다)과는 일정 정도 교감이 되어 있는 듯 하다. 덴소의 계획이 완성되기 까지 물량확보 등은 양재동에서 반드시 챙겨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덴소는 이에이치이를 협력업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무노조, 비정규직공장이라고 부른다. 일본자본 덴소의 무노조 비정규직화가 한국와이퍼 신차 단종사태의 본질이다. 이것이 노조가 바라보는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다. 물론 노조의 시나리오가 틀릴 수도 있다. 노조는 이 모든 가설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회사가 침묵하고 있으므로, 투쟁을 통해 검증해 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