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매듭
시간의 매듭은 간결하게 보인다. 숫자의 완결성에 눈이 멈추어서 그럴 것이다. 100년 단위나 10년 단위로 기억하는 역사적 사건의 다양한 행사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매듭은 결코 간결하지 않다. 어떤 매듭이든 수많은 시간과 사건의 타래로 엮여져 있어서, 그 의미가 중의적이고 삶의 변곡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10년 단위의 연령대를 구분하는 매듭이든, 태양의 움직임에 따르는 24절기든, 매듭에는 계승과 단절과 시작이 함께한다. 2020년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적 매듭이다. 그 매듭은 전태일 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분신사망한지 50주년이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국가와 자본의 탄압과 눈보라를 뚫고 ‘노동해방의 깃발’을 세우며 출범한지 30주년이다. 두 매듭은 너와 나의 슬픔이고 분노였고 투쟁이었고 희망이었다. 너와 내가 자신의 ‘권리’를 사랑하기로 한 기나긴 여정의 희망봉이었다.
현재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위기상황에 빠졌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조합원은 임원이나 집행부가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마다 총회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임원과 집행부를 교체하곤 했다. 총회 민주주의의 디딤돌이 야단법석과 광장인 만큼, 시끄럽고 갈라지고 서로 싸우면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물론 평가의 대상이었던 임원과 집행부가 조합원 총회로 교체되지 않기도 한다. 이 과정이 쉬운 것도 아니고, 조직력이나 투쟁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지만 민주노조운동의 시간은 말하고 있다. 변화를 꿈꾸는 운동이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던가? 국가와 자본은 노동자가 주도하는 변화를 저지하기 위해 늘 통제와 탄압을 일삼는다. 그 형식과 내용이 다를 뿐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보운동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답답함을 토로할 때마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에 대해 한마디씩 내뱉는 말들이다. 조직의 위기, 투쟁의 위기, 공감의 위기, 연대의 위기 등이 범람하는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자본과 국가는 민주노조운동을 ‘위기의 늪’에 빠뜨리기 위해 늪 주변을 어슬렁대고 그 주변을 관리하는데 익숙하다. 민주노조운동의 시간은 항상 위기를 디딤돌 삼아 새롭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이 운동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위기의 늪이 형식과 내용에서 매 번 다르건만, 왜 너와 나는 ‘위기’를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반복하는 것인가? 입으로는 ‘위기’를 말하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거나 ‘위기의식’을 체화하지 않는다. 시간의 매듭은 ‘위기’를 즐기자고 한다. 민주노조운동이 늘 반복되는 위기를 새롭게 매듭하자 한다.
우리들은 늘 위기에 직면했을 때마다 조직 내부의 혁신에 진력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던 것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위기를 진단하고 내부의 혁신과제를 논의하고 제시했던 적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말이나 글로 횡횡했던 혁신과제들이 조직의 심장으로 수혈되기가 쉽지 않았다. 같은 시공간에서 조직의 혁신을 위해 함께 말하고 논의했던 것들이, 돌아서면 남의 것이거나 종파의 것으로 치부되고 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더 나아가 혁신의 과제들이 지도부의 교체문제로 국한되고 마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민주노조운동의 매듭은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뜨거우면서도 차가웠고, 냉철하면서도 온기가 넘쳤던 그 시절, 그 시간과 공간 속에 당신이 있었을 텐데, 지금은 내 자신이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현상의 주요 원인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데 있다. 자신이 서 있었던 시간과 공간을 끌어내는 힘이 부족하다. 조직의 뒤와 앞을 보지 않는, 아니 볼 수 없는 ‘현실 조급증’과 무관하지 않다. 한 알의 씨앗은 시간과 공간을 머금고 있어야만 열매를 뱉어낸다. ‘빨리, 빨리’라는 지배적 담론은 숙성시키거나, 자신의 몸과 마음에 덮여 있는 맛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던 ‘장맛’을 빼앗아 가버렸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화급하면서도 조급하게 움직이는 내 모습과 네 모습!’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살릴 수 있다는 만고불변의 원칙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준비하지 않는 내 모습과 네 모습!’ 준비는 ‘장맛’을 익히는 시간과 공간의 열정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민주노조운동은 묵히고 삭히는 장맛을 살려내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미래에 대한 꿈을 다시 꾸어야 한다. 우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희망단지’를 구워왔다. 너와 나의 땀과 시간으로 만든 민주노조운동의 역사가 그것이고, 그것을 만든 너와 나의 손길과 숨결이 숨을 쉬고 있는 조직의 흔적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희망단지’를 곁에 두고도, 그 속에 수많은 혜안이 있음에도, 자신의 ‘희망단지’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시간의 매듭 속에서 자신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서글픔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어제를 오늘과 내일의 모습으로 내비쳐보면서, 자신의 꿈과 희망을 사유하고, 너와 나의 자식까지 엿볼 수 있는 ‘힘’은 바로 우리가 만들었던 ‘시간의 매듭이라는 희망단지’가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