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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차선이나 차악보다 ‘뿌리가 건강한 최선의 권리’를 위해

김영수/상지대학교
금속노조연구원   |  

육신에 병이 들어서 깊은 산골로 내려와 농사와 연구를 병행하다 보니 벌써 10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 덕에 육신에 들어왔던 병은 몸 밖으로 서서히 나가고 있는데, 요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병이 새로 들어왔다. 내 스스로 문진을 하면서 내린 진단의 결과이지만, ‘정치와 선거 혐오증’이 내 일상을 뒤덮는 아픔이었다. 내상이 상당히 깊다. 바람이 있다면, 나만 이 병증에 시달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병증에 감염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아무튼 아픔이 심한 이유는 아프리카의 공동체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민주주의와 권리의 문제를 평생의 업으로 삼으면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노동자 계급이 권력의 주인이 되는 사회체제’를 꿈꾸었던 내 삶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이다. 스스로 내 자신을 부정하는 ‘내 안의 반란’이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 용솟음쳐서 그런지, 육신과 정신은 반란의 송곳질로 많이 아프다. 적지 않은 양으로 채우는 이번 칼럼을 쓰면서 치유하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가장 큰 병증은 2022년 대통령선거나 지방선거가 눈앞에 어른거려도 거들떠보지 않는 ‘내 안의 반란’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려고 애쓰지만, 반란의 힘이 나를 짓눌러 버린다. 반면에 정치나 선거에 대한 방관의 즐거움만이 나를 유혹한다.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니. 그저 놀랄 뿐이다. 나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터넷의 각종 포털사이트를 도배하는 거대 양당 대통령후보들이나 관련 기사들은 나의 스트레스 지수를 올라가게 하고, 범죄가 정당화되는 ‘비정상 사회의 뿌리’를 움트게 할 수 있다는 판단까지 들게 하는 것도 큰 원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차선이나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정치의 선순환이라고 말하곤 한다. 지금까지 민주적인 사회로 변해왔다는 말과 함께, 차선이라도 노동자·민중에게 우호적이고 시혜적인 권력과 힘을 가져야 개혁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격언도 잊지 않는다. 최선을 말하는 순간, 정치와 권력의 현실에 무지한 근본주의자로 내몰린다. 나는 물론 이런 말에 발끈하기도 하고, 차선과 차악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너와 나의 무책임성을 질책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요즈음 대의제도가 대리주의로 전락했고, 직접적이고 자치적인 민주주의가 정답이라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이제는 원칙만 내세우고 싶지도 않고, 말과 행동이 통일되지 않는 모순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싶어서다.  


그 동안 민주노조운동의 조합원이나 간부들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체제의 대전환’을 최선의 가치로 삼고 있지만, 그 가치는 이제 변하였다. 존재하더라도, 추상화된 언명의 수준이다. 어느 순간부터 차선과 차악이 지혜로움의 상징으로 변신하였다. 


조합원이나 간부들은 이제 차선이나 차악의 선택이 최선이라는 관행의 힘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힘 중에서 대표적인 것 한 가지만 말하겠다. 정치와 삶이 자연스럽게 분리되는 현상이다. 문재인 정권은 약 4년 9개 월 동안 엘리트들의 권력리그가 무엇인지 잘 드러냈다. 정책의 온갖 폐해는 물론이거니와 사람이 먼저이고 노동이 존중되는 사회의 가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차선이 최선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의 잔치’나, 권력이 주도하는 ‘개혁의 허상’은 이제 막다른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의 권력자들이나 권력시스템은 다양한 차선이나 차악의 포장지로 번드르하게 포장되고 있다. 그들만의 권력 카르텔은 굳건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식과 행동은 그러한 권력 카르텔의 포승줄에 묶여 버렸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최선의 정치와 가치는 삶 속에서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중이다. ‘개혁이 없는 개혁의 늪’에 빠져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극우 보수세력이나 자본가 계급의 권력이 두렵다는 솔직함도 없다. 두려움에 중독되고 양면성을 내면화하는 자기혼란이 자기부정이라는 지점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말이나 글로는 권리의 주인이라고 하면서도, 존재의 근본인 권리를 육신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 현상이 즐비하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달라고 요청하면서도, 불이 난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는 모르쇠 하는 경우들이다.  


최근 노동자·민중 대선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민중경선 추진 조합원 서명운동본부의 서명활동이 전개되었다. 민중경선 추진본부는 지난 9월 경부터 10만 명의 서명을 조직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민주노총과 5개 정당에 제안·논의하면서 서명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민중경선의 정치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6,000명만 서명에 참여하였다. 서명에 참여한 조합원이나 간부들의 열의와 열망을 훼손하고 싶지 않다. 차선이나 차악이 아닌, 최선의 정치로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이루려 하였고, 권리의 뿌리를 건강하게 만들려 했던 노동자·민중의 정치활동이어서 그렇다. 차선이나 차악이 판을 치는 요즈음, 이것도 대단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0이 100의 힘으로 바뀔 수 있다면, 6,000은 6,000,000의 세력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도 정치방침을 결정하면서 민중경선을 채택하지 않았고, 진보적인 정당들과 함께 기득권 보수양당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위력적 선거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하여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기틀을 다지겠다는 관성의 틀만을 고수하였다. 진보적인 5개 정당도 민중경선을 모델로 하는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선거 때면 늘 되풀이되는 ‘민주노총·진보정당 공동대응 기구’만큼은 가동시키겠다는 결정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결정의 이유나 논거는 무궁무진하다. 그 중에 하나는 조합원이나 간부들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나 정치활동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정치의식이 노동자 계급이 지향하는 최선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맞다. 조합원이나 간부들의 정치의식이나 정치활동의 수준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조합원이나 간부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듯 한다면, 이 또한 차선이나 차악의 정치와 사뭇 다르지 않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최선의 정치가 일상의 삶 속에서 사라진지 10년이 넘은 듯해서 하는 말이다. 민중경선 운동본부 운영 실무팀의 평가에 답이 들어 있다. 차선과 차악의 대표선수인 보수정당의 정치활동이 노동현장을 잠식하는 동안, 최선의 정치는 어디에 있었는가? 진보정당이 갈라지고 제각각 자리를 다시 잡는 동안, 노동자 계급의 통일을 꿈꾸는 정치는 어떤 활동을 했었는가? 노동자·민중의 삶이나 노동의 현장과 분리되어 이루어진, 또 다른 엘리트들의 정치리그가 만들어졌던 것은 아닐까? 


민중경선을 위한 정치활동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뱃고동일 수 있다. 이 소리는 삶의 현장이나 노동의 현장이 정치로 일상화되어야 한다는 알림이기도 하다. 일상에서는 ‘최선’이라는 가치를 삶의 정표로 내세우면서, 정작 자신의 권리로 만들어진 권력이나 힘 앞에서는 슬그머니 차선이나 차악으로 바꾸는 도돌이표 정치를 끝내자는 것이다.


삶의 현장이든 노동의 현장이든, 권력의 통치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권력의 힘에 순응하거나 동의하면서 의지하는 것을 삶의 지혜인양, 그 잣대와 기준만으로 권리를 지배하면서 일상을 심판하려 한다. 권력이 자신의 뿌리인 권리를 좌지우지하는 ‘역설의 시대’가 되었다. 그야말로 뒤죽박죽이다. 최선의 정치는 ‘역설의 시대’를 ‘건강한 뿌리로 성장하는 권리가 보편화’되는 정설의 시대를 앞당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모순을 스스로 단절하는 자기혁명이 있어야 한다. 썩어버린 뿌리를 잘라내고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야 그 자리에 새로운 뿌리와 줄기가 나와서 건강하고 맞진 사과가 열리듯, 12년 동안 깊은 산골살이 하는 동안 슬그머니 들어와서 마음을 아프게 하는 정치혐오 병증을 이겨낼 처방이 사과밭에 있었다. 멀리 있지 않았다. ‘권리의 건강한 뿌리’를 만드는데 필요한 단절이나 절단이 그 혜안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