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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하게 정말 잘 죽자

김영수/상지대학교
금속노조연구원   |  

친하게 지냈던 한 친구가 몇 년 만에 집으로 찾아와서 반갑게 차담을 하는 와중에, 친구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말을 던졌다. ‘너는 귀농・귀촌해 살면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니?’ 나는 순간의 뜸도 들이지 않고 대답하였다. ‘잘 죽고 싶다.’ 13년 전에 죽음의 벽을 어렵게 넘어서고 난 이후, 산골에 들어와 주변과 함께 잘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내 바람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러나 친구는 한참 동안 말없이 자기 시간을 갖더니, 내 바람을 다르게 표현하였다. ‘잘 죽고 싶다.’는 것은 ‘잘 살겠다.’는 것이네. 나는 친구에게 자네 말이 맞다고 하면서 마음의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독자들이 혹시나 오해할 것 같아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나는 돈 많이 벌어서 잘 살자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내 삶을 담박하게 말하면서 숨을 거둘 수 있도록 살아보자는 말이다.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병이 급성으로 들어와서 죽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죽더라도, 잘 살다가 죽어가는 세상을 바라는 내가 너무 이상주의에 빠져 있고, 공허한 바람에 불과한 것일까?


요즈음은 갓난아이의 탄생을 알리는 울음소리가 사라져 가는 대신, 초고령 100세의 바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건강하게 살다가 죽자는 바람, 기운을 마지막까지 소진시키고 죽자는 바람, 주변과 관계를 바라보고 사랑하다가 죽자는 바람, 소확행이 흘러넘치는 생활을 하다가 죽자는 바람. 그래서 누구나가 잘 죽고 싶다는 말 한마디쯤은 한다. 잘 죽고 싶다는 바람이 여기저기에서 차고 넘친다. 


그러나 잘 죽고 싶어도 그렇지 못하는 곳이 있다. 노동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도 누구나 바라듯이 잘 죽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별개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2011년부터 2021년까지 노동현장의 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는 총 21,351명이다. 1년 평균 1,941명의 노동자가, 하루 평균 5.3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있다. 그리고 질병 재해로 고통을 받는 노동자는 2021년에만 122,713명이었다. 또한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노동열사부터 2019년 11월 29일 자결한 문중원 열사에 이르기까지 약 227명의 노동열사의 죽음도 있었고, 노동자의 기본 권리를 노동자의 자리에 앉히려고 자신의 시공간에서 투쟁하다가 사고사나 과로사나 병사로 죽은 노동자들의 숫자는 아마도 수 만 명에 이를 것이다. 


이런 사망 재해나 질병 재해와 노동열사의 통계를 접하면서 드는 생각은 아주 간단하다. ‘노동자들은 살아가는 동안 차별과 착취의 골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지만, 죽음도 마찬가지구나. 노동자나 유가족들이 흘려야 하는 통곡의 눈물이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지만, 노동자들을 불평등한 죽음의 장으로 내몰고 있구나.’ 더군다나 장례나 추모행사를 생각하면, 죽음의 불평등을 정상화하는 사회의 정체성에 신물이 난다. 권력을 누렸던 자들에게 씌워지고 목에 걸리는 죽음의 훈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국장, 국회장, 사회장 등과 같이 장례와 추모의 차별을 상징하는 제도도 사라져야 하지만, 이제는 너와 나의 마음속에서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죽음에 대한 차별의식’을 말해야 하고, 그러한 차별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한다. 노동자들의 죽음을 방치하거나 방관하고,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고 발생할 수 있는 사건으로 치부하고 마는 사회적 불감증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2022년 1월 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었다. 이 법률 제2장은 중대산업재해를 예방하고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각종의 조치와 처벌규정을 담고 있다. 2004년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건을 계기로, 최근 기후변화나 대기오염 때문에 발생하는 호흡기 질병재해나 Covid19 등이 안전과 생명의 문제를 부각시킨 것은 맞다. 그러나 인류가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가 있다. 본성적 욕망의 터는 사건이 아니라, 노동이고 노동현장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자연이나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안전과 생명을 걸어야만 했던 삶의 터였다. 그런데 모른 척 하거나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시스템의 감옥에 사람들을 가두고, 이러한 터를 놓고서 주고받기 식으로 땅 따먹기 하는 경우가 많은데,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인류 생존의 가치이자 정상 사회의 기본이다. 어떤 권력이나 자본이나 개인도 그 가치와 기본을 무도하게 침범하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절대선인 사회, 너와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아주 평등하게 잘 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