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위기, 헤게모니 투쟁으로 돌파해야
또 새해가 왔다. 시간은 어김없이 앞으로 가는데 사회는 자꾸 뒤로만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회적 양극화, 고용안정, 노동강도, 산업 안전 그리고 대형 참사 등등, 어느 것 하나 진전된 사안이 없다. 그래서 파업과 단식, 고소와 호소 등 온갖 협상과 투쟁 수단을 동원하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대답은커녕 위협과 압력이 돌아온다. 화물연대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이 그것이고,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내놓은 노동시간과 임금제도 개편안은 노동은 시장에 적응하라는 자본 측의 명령과 다름없다. 노조 혐오적 인사들이 정부 요직에 발탁되더니, 급기야 노조를 척결해야 할 사회 부패세력 중의 하나로 몰아 노조개혁에 나서겠단다. 이 정부의 뿌리 깊은 반노동적 정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다. 민주주의란 제도적 형식만 갖추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대화와 협상을 통해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정치체제를 일컫는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형식만 존재한다. 그 속에 국민의 목소리가 채워지지 않아 사회갈등의 해결 방향은 일방적으로 권력자의 입에서 나온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사회적 공존의 장은 좁아지고, 국민은 참여를 거부하며 입을 닫거나 극한투쟁으로 나서고 있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가야 할까?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민주주의의 위기가 앞으로 더욱 심화 되지 않을까 매우 걱정된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의 반노동적 행태로 지지율이 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노조와의 대화를 피하고 대립적 상황을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듯 노조의 요구와 행동을 불법으로 낙인찍고, 이를 분쇄하는 것이 법과 원칙을 지키는 일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선전한다. 지지율이 올라간다는 건 그와 같은 반노동적 행태가 먹혀들어 간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미국 사회를 조명하면서 상위 1%에 부가 집중되는 <1:99>의 불평등사회를 주창한 스티글리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미국과 같이 1인 1표의 민주적 선거체제를 갖는 사회에서 어떻게 모든 게임의 규칙과 정책이 상위 1%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까? 왜 하위 99%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지 않을까?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불평등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1%의 논리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1%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유인책이 있어야 투자가 일어나고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논리를 편다. 1%의 이익과 99%의 이익이 상충하지 않고 서로 부합된다는 것이다. 정치와 언론에 엄청난 로비를 통해 이 논리는 사회적으로 먹혀들었고, 99%는 그 1%의 프레임에 갇혔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전 국민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체제이어야 하는데, 갈수록 이와는 멀어져 간다. 1%의 농간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그가 던지는 메시지다.
우리가 겪는 작금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노동을 억누르는 노동정책에 정부의 지지율이 올라간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소수의 자본과 정치 권력이 만든 프레임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귀족노조’, ‘무소불위 노조’, ‘부패 노조’, 심지어 ‘착취 노조’까지 노조를 겨누는 프레임은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사회적 양극화와 경쟁력 저하의 책임이 온통 노조에 있는 양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노조에 씌워진 그 프레임은 얼마나 사실일까?
최근 노동부는 한국의 노조가 영세기업의 취약노동자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노조의 권력 비대화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양극화의 주요요인이라 지목했다. 심지어 대통령은 현재의 노조 체제는 “소수의 귀족노조가 다수의 노동 약자를 착취하고 약탈하는 구조”라 했다. 대통령의 언어라기엔 믿기 어려운, 노조에 대한 엄청난 반감이 담겨 있는데, 어쨌거나 이 같은 프레임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노조의 책임으로 전가되는가. 먼저 비정규직은 노조가 만든 것이 아니다. 비용 절감 차원에서 자본이 만든 것 아닌가. 근본적으로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뻔한데도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노조가 비정규직을 포용하지 않는 정규직 중심이라고? 그렇지 않다. 2022년 8월 통계청 경활조사에 따르면 전체 임금노동자 중 비정규직은 37.5%를 차지한다. 민주노총의 전체 조합원 중 32.3%가 비정규직이다. 한국 노동시장의 전체 고용형태 분포에 상응하는 수치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 가면 산별 산하조직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많은 연대 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근본적으로 기업과 정부가 풀어야 할 문제다. 노조에 책임을 돌릴 일이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도 노조의 문제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대기업의 조직률이 높고 중소기업의 조직률이 낮은 것은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자본은 마치 한국의 노조만이 대기업 중심으로 조직되어 영세기업의 노동자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듯이 힐난한다. 영세기업 취약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고 기업 간 격차를 줄이려면 중소기업의 노조 조직률을 높이면 된다. 아니면 유럽처럼 산별교섭을 확대하는 방안도 있다. 최근의 노조법 2·3조 개정 요구도 취약노동자의 어려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자본과 정부가 이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노조 조직률을 높여 노동의 ‘상향 평준화’를 지향하는 대신 기존의 노조마저 무력화시켜 ‘하향 평준화’의 길로 가려는 것인데, 이런 퇴행적 노동정책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새해에는 노조에 씌워진 프레임을 하나하나 벗겨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다. 그람시의 용어를 빌리자면 ‘헤게모니’ 싸움이다. 헤게모니란 피지배 계급이 지배계급의 이념에 스스로 동화되어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른바 ‘도덕적’ 지배력을 말하는데, 현대사회(자본주의)의 통치는 바로 여기에 기반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즉, 지배계급의 권력이 강압적 수단에 의지했던 전근대사회와는 달리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피지배 계급(노동자)의 자발적 동의에 기반하고, 이 때문에 체제 변혁적 사고와 운동세력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정부의 반노동적 행태가 사회적 지지를 받는다는 건 그만큼 노동계가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이며, 그만큼 많은 국민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동화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무엇이 사실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바로 세워야 한다. 현장과의 더 많은 토론과 교육, 시민사회와의 더 많은 소통과 협력, 공동연구, 다양한 소셜미디어와 대중매체의 활용 등 헤게모니 싸움을 강화해야 한다. 헤게모니 싸움이란 대안적 담론을 형성하여 사회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문화운동이자 민주적 계급투쟁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