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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코로나19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민낯

이문호 / 워크인연구소 소장
금속노조연구원   |  

‘코로나 위기’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세계의 어두운 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수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환자들, 오갈 데 없는 실직자들의 초췌한 모습, 감염 위험을 피해 축구장 주차장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잠을 자는 노숙인들, 사회부조로 연명하는 빈민자들, 최근 신문의 사진과 TV 화면을 통해 자주 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진 또는 화면들이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서구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것이어서 더욱 눈길이 간다. 개발도상국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번영의 나라라고 뽐내던 서구사회에서 그러한 초라한 모습들이 나타날지 누가 알았겠는가.

 

트럼프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로 자화자찬한 미국은 더욱 심하다. 확진자 수는 170만 명에 달하고, 사망자수는 10만 명이 넘었다. 미국이 전 세계 사망자 수의 거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높으며, 실업자 수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세계 1위다. 이 비참함에 놀란 트럼프는 그 책임을 코로나19의 진원지인 중국으로 돌리려 애쓰고 있으나, 바이러스가 어디서 생겼든 그것을 막지 못하고 그 많은 희생을 낸 것은 미국의 시스템이 갖는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서방의 국가들은 코로나19 발생 초기에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겼다. 역병은 미개한 사회에서나 발생하는 것이며, 자신들의 나라에 온다 해도 금방 퇴치할 것이라는 오만함도 보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코로나19가 유럽과 미국으로 번져나가자 서구사회는 통째로 무너졌다. 그들의 우월감도 같이 무너졌다. 이것이 동구권 사회주의에 대해 ‘승리’를 구가한지 30년이 지난 지금, 서구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보여주는 민낯이다. 그들이 자랑하던 ‘시장경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지금은 그저 ‘국가’에 기대어 되살아나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이후 서방 세계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로, ‘포디즘’이라 불리는 당시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서구의 대안이었다.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앞장 서 구축한 신자유주의적 체제에서는 ‘사회적 책임’이 ‘개인적 책임’이란 말로 대체되었고, ‘국가’ 대신 ‘시장’이 문제해결사로 등장했다. 경쟁력이 최고의 선으로 추앙되었고 노조는 이에 걸림돌로 눈총을 받았다. 무력화 시도도 일어났다. 사회적 연대는 약화되었고 국가시스템은 축소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코로나19의 습격을 받았으니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장은 이윤을 쫓는데만 능했지 이와 같은 위기에 대응능력은 전혀 없었고, 국가는 그동안 시스템이 축소되어 자신의 역할과 능력을 잃어버렸으며, 사회는 사회대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모두가 개인화되어 연대적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 같은 상태에서 코로나19는 아무런 방해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묘하게도 자본주의는 자신의 위기 탈출 비용을 취약계층에 전가하는 능력이 있다. 1980년대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포디즘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것으로, 비정규직을 비용절감의 도구로 양산, 활용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당시 오랫동안 임금인상이 정체된 빈곤층을 유혹, 약탈적인 대출을 통해 돈을 벌려다 벌어진 일이다. 현재의 코로나 위기도 대부분 취약계층이 비용을 떠안고 내몰리고 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계약직 또는 일용직이나 특수고용, 하청노동자와 같은 취약계층이 일자리를 더 많이 빼앗기고 있다. 이로부터 사회적 양극화는 더 심화된다.

 

이제 신자유주의 체제는 위기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때문에 지금은 누구나 국가를 쳐다보고 있으며, 실제로 모든 나라에서 강력한 국가의 개입이 일어나고 있다. 시장의 시간에서 국가의 시간이 온 것인데,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체제는 과연 변화를 가져올까?

 

이는 지금 국가의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의 ‘정상화’ 또는 ‘복원’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여기에 위험성이 있다. 확실한 문제의식을 갖고 정상화 또는 복원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지난 세계 금융위기 때에도 자본주의의 위기 또는 심지어 자본주의의 종말까지 얘기됐으나 신자유주의 체제는 그대로 다시 돌아왔다. 지금 말하는 복원이 이래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위기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판명된 이상 그와는 다른 시스템을 구축할 프레임을 짜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정부의 ‘한국판 뉴딜’ 프로젝트를 보면 지난 금융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체제가 복원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된다. 한국판 뉴딜은 시스템 패러다임은 보이지 않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사업모델 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는 다시 시장의 역동성을 살리고, 여기에 미래를 맡기겠다는 얘기다. 신자유주의로의 회귀다. 코로나 위기가 주는 교훈은 신자유주의로부터의 탈피인데 우리가 가는 길은 그 반대인 것 같아 불안하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시장의 복원이 아니라, 그동안 시장에 의해 파괴되었던 국가와 사회 및 생태계의 복원이다. 그래야 우리의 안전이 보장되고 위기에 취약한 시장도 지속가능해진다. 그렇지 않고 시장의 역동성만 복원되면, 이번 코로나 위기에서 보았듯이 또 다른 위기가 닥칠 때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국가의 복원은 강력한 사회복지를 구축하는데 그 핵심이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 비용이 불공정하게 취약계층에 넘어가지 않도록 국가의 역할이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동시장의 개입을 통해 위기 시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시장의 복원력을 높여준다. 지난 세계 금융위기 시 독일경제가 영미권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했는데, 그것은 독일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고 대신 ‘단축노동’을 통한 고용보장을 택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복원은 무엇보다 연대와 신뢰의 회복이 핵심이다. 그동안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개인은 사회적 관점을 잃고 경제적 관점에만 매몰돼 개인화되고 협동능력을 키우지 못했다.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노조와 시민단체들의 활동 공간을 넓혀야 한다. 이 속에서 사회적 연대가 강화되고 사회적 자본인 신뢰가 형성된다. 연대와 신뢰는 위기 극복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평소 거래비용을 감소시켜 경제활동의 효율성도 높여준다.

 

생태계의 복원은 인류의 생존과 연결된 문제다. 에너지 전환 없이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성장이 지속되면 지구의 미래는 없다.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이 심해지는 것도 기후변화에 원인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날 성장을 위한 노사정의 ‘담합’이 지금의 생태계 위기를 가져왔다는 비판도 많다. 시장의 역동성을 무조건 찬성할 수 없는 이유다. 앞으로의 성장은 반드시 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의 문제와 결부시켜 논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자유주의적 성장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