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칼럼 > 칼럼
칼럼
 

코로나에 할퀸 세상, 무엇으로 치유하나?

이문호/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금속노조연구원   |  

코로나가 우리를 덮친 지 1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그 끝이 언제일지 가늠할 수가 없다. 최소한 1년은 또 이렇게 비상사태하에서 지내야 할 것 같은데, 도대체 세상은 어떻게 바뀌고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인간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질병과 죽음이다. 2021년 1월 26일 기준으로 전 세계 코로나 누적 확진자는 1억 명이 넘어섰으며, 사망자는 214만 명이나 된다, 가장 최악인 나라는 미국이다. 전 세계 확진자 4명 중의 하나는 미국인이며, 사망자는 5명 중의 하나가 미국인이다. 그동안 세계를 지배한 초강대국의 민낯이다.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이 도대체 사회적으로 무슨 소용이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공공성과 사회안전망이 구축되지 않으면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일반 국민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없다. 노조와 시민사회의 힘을 키워야 할 이유다. 


코로나는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다. 세계는 2차 대전 이후 가장 큰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 2020년 중국만이 플러스 성장을 기록하고(2.3%), 나머지는 모두가 마이너스 성장이다. OECD는 2020년 미국 –3.7%, 일본 –5.3%, 독일 –5.5%, 프랑스 –9.1% 등 전체 평균 –4.2%의 경제 성장률을 예상한다. 그래도 한국은 –1.0%로 OECD 국가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성적이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방역 조치에 비교적 선방한 탓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따르면 2020년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갈등에도 불구하고 사상 처음으로 미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직접투자를 유치했다. 미국은 트럼프 정부의 강력한 리쇼어링 정책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방역의 실패로 전년 대비 절반이나(49%) 줄어들었다. 이렇게 볼 때 향후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변수는 ‘효율성’이 아니라 ‘안정성’이 될 것이다. 글로벌 가치사슬도 효율성에서 안정성 위주로 재편될 전망이다. 더 강한 보건안전 시스템이 요구되는 이유다. 


노동시장도 크게 위축되고 있다. ILO에 따르면 코로나로 사라진 전 세계의 일자리가 2억 5500만 개나 된다. 한국도 작년에 21만 8천 명이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실업 위기에 놓인 노동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모든 위기가 그렇듯이 코로나 역시 비정규직, 소상공인 등 사회적 약자층을 더욱 아프게 파고들어 양극화는 심화 된다. 이들을 포용하는 ‘큰 정부’가 없다면 사회는 두 쪽 나고 방역의 뚝은 무너지기 쉽다. 


최근 헬스, 노래방, 카페 등 중소자영업자들의 항의 시위는 큰 정부가 왜 필요한지 잘 말해 준다. 이들은 처음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영업 제한이 길어지면서 이제 더 이상 연명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코로나에 걸려 죽으나 장사를 못해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나섰다고 했다. 큰 정부가 없으면 이러한 상황은 정치적으로 악용되기 쉽다. 트럼프는 코로나로 인한 양극화 현상을 정치적 권력 투쟁의 도구로 삼았다. 취약한 사람들을 더 어렵게 만드는 방역보다 경제 활성화에 매진하겠다는 그의 정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방역과 경제 모두 실패했지만 위기시 양극화를 부추기고 사회적 약자를 이용해 파시즘이 등장할 위험성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방역과 경제,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완화하여 사회적 연대를 고취시키는 큰 정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 국민 고용보험, 재난지원금 또는 기본소득, ‘상생연대 3법’ 등에 대한 그동안의 논의를 더 과감한 방식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코로나는 일터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사무직 노동자들의 재택근무가 늘어난 것이 눈에 띈다. 근무시간과 장소의 유연성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강요적으로 실행되었던 이 근무형태는 디지털화와 더불어 코로나 이후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여기서 근무시간과 장소에 대한 노동자의 선택권을 강화하면 자신의 상황에 맞게 조정할 수 있어 일과 생활의 조화를 높일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미지불 노동시간이 늘어나고, 특히 여성 노동자의 부담이 증가하고 있다. 코로나로 아이들이 유치원 또는 학교에 가지 않게 되자 여성들의 돌봄 노동이 증가했고. 이는 재택근무 시 집에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게 됨으로서 커다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아예 휴직을 하거나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들도 많다. 전통적인 남녀의 사회적 분업이 다시 강화되고,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불리해지고 있다. 따라서 근무장소와 시간을 선택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성별 분업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 뒤따르지 않으면 코로나가 가져오는 일터혁신(재택근무)은 일과 생활의 경계를 무너뜨려 미지불 노동과 스트레스, 남녀 불평등을 증가시킬 것이다. 


따지고 보면 코로나로 입은 상처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여러 영역에서 나타나는 불평등과 사회적 연대의 파괴는 그동안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남긴 상처이며, 코로나는 그 위를 한 번 더 할퀴고 지나간 것이다. 때문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로나로 입은 상처는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를 막아내는 방식이 나와야 치유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지금 모든 나라에서 쏟아붓는 천문학적 경기부양책은 잠시 마비된 자본주의 체제를 다시 복원시키려는데 핵심이 있다. 작금의 위기가 그 체제에서 온 결과라는 것을 잊고 있다. 자본주의적 성장정책으로 사회적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지금까지 우리가 충분히 경험한 사실이다. 사회적 연대 또는 통합은 말할 것도 없다. 


더 큰 문제는 환경과 기후변화의 문제가 다시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코로나로 받은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그건 과거의 성장정책에 대한 성찰이었다. 생산과 소비의 둔화로 온실가스가 줄어들고 맑은 하늘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지난날 우리의 성장과 소비 패턴이 얼마나 지구를 파괴하는지 실제로 느끼게 됐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있다. 더구나 한국은 ‘기후 악당’ 국가로 비난받고 있으며, 1인당 플라스틱 소비량도 세계 최고다.


과거로의 회귀는 코로나로 입은 상처를 치유할 대안이 될 수 없다. 코로나 위기가 끝난다 해도 팬데믹은 지금보다 더 자주 나타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저지른 환경파괴로 우리가 알 수 없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윤추구의 가치사슬로 연결되는 세계화는 이를 삽시간에 온 지구로 퍼트린다. ‘큰 정부’는 경제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적 문제를 같이 해결하는 균형 잡힌 투자전략을 세우는데 그 핵심과제가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