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칼럼 > 칼럼
칼럼
 

노동의 ‘즐거움’과 ‘권리’를 상상하는 유토피아!

김영수/상지대학교
금속노조연구원   |  

육신이 허락할 때까지 노동의 고통과 기쁨을 즐기다가 죽을 수 없을까?


100세 시대라고 하는 초고령 사회다. 90세 이전에 돌아가시는 부모들에게 아쉬운 마음의 국화꽃을 바치는 시대다. 그런데 나는 지난 12년 동안 월악산 자락의 깊은 산골로 내려와 살면서 적지 않은 죽음을 만났다. 평생 농사일만 하던 자신의 노동을 내려놓고 돌아가시는 부모세대들이었다. 그 분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김 씨 아저씨다. 김 씨 아저씨가 갑자기 병원으로 긴급 호송되었다는 말을 듣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답이 아주 간단했다. ‘밭에서 일 끝나고 집으로 가시려다, 밭에서 쓰러지셔서 119로 실려 갔단다.’ 김 씨 아저씨는 80대 초반이셨다. 김 씨 아저씨는 아프고 몸에 병이 들어와 쓰러진 것이 아니라, 평생직장이었던 자신의 밭에서 자신의 모든 기운을 소진시키고서 쓰러지신 것이다. 김 씨 아저씨는 병원에서 약 15일 정도 누워 계시다가 아주 편하게 돌아가셨고, 마을 뒷산 중턱의 양지바른 곳으로 들어가셨다. 


김 씨 아저씨는 100세 시대와 무관하게 노동의 고통과 즐거움을 누리다가 행복하게 돌아가셨다고 해야 맞다. 정말 부럽다. 오늘도 김 씨 아저씨가 쓰러지신 밭을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읊조린다. 노동이 없는 노년의 삶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신 김 씨 아저씨, 고맙습니다. 건강해야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노동의 권리가 죽을 때 까지 보장되어야 한다는 노동의 천부인권적 본성을 일깨움이기도 하다.


이처럼 김 씨 아저씨의 노동은 삶의 본성적 욕구에서 비롯되었지만, 실제로는 사회체제를 작동시키는 공공적 행위였다. 김 씨 아저씨의 노동이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반석이었다. 노동이 없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노동의 가치를 천부인권적 권리로 인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들어 있지 않을까를 곰곰이 삭이며 살고 있다. 유엔이나 세계헌법이 노동의 권리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들어 있을 것이다. 유엔도 헌장 제31조에서 노동 권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모든 노동자는 건강, 안전 및 존엄을 존중하는 노동조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최대 노동시간의 제한, 일간 및 주간 휴게시간, 연차유급휴가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1항, 2항) ‘노동 존중’은 정치적 수사로 하는 허언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를 천부적인 권리의 수준으로 실체화하고 사회의 보편적 시스템으로 구축하는 노동 행위다.


노동 상실의 위기를 노동의 격조로


기술력이 노동의 일자리를 앗아가는 것이 자연스런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사람들의 일자리를 보장하지 않는 사회 자체가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꿈틀이가 아닐까.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뇌리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는 합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내 안에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돈과 권력에 순응하는 대신,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에 만족했고, 정신적 빈곤의 아련함과 씁쓸함을 고된 노동으로 대신하거나, 자식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켰다. 삶의 미래가 불확실한데도 자신만은 확실하게 보장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노동현장의 육체노동은 기피 대상으로 되어버렸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노동양식으로 변해버렸다. 노동자들 스스로도 자기 자식들만큼은 육체노동이 아닌 정신노동을, 또는 정신노동을 넘어 권력을 집행하면서 살게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 출세경쟁의 승리자가 되려는데 중독되었다. 누구나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라 하면서 처방전도 갖고 있지만, 그저 내팽개치는 처방전일 뿐이다.


이러한 유혹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강렬한 힘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대표적인 현상은 노동자 스스로 노동의 주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쉽게 내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공돌이와 공순이’ 생활의 부끄러움이 강요되고, ‘노동자’ 대신에 ‘근로자’의 성실성을 수용했던 그들에게는, 늘 통치의 대상으로 있으면서 착취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그들에게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떨쳐버릴 수 없었던 삶의 짐이다. 노동과 삶의 ‘격’이 무너지는 악순환 구조가 적폐로 정착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휴식이나 레저는 노동자의 생활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돈이 있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즐기는 거리였다. 그런데 휴식이나 레저나, 정신과 육신의 여유와 상호 배려가 함께 하지 않는 노동은 권리라고 볼 수 없다. 헬조선에서는 실업자도 많고 취업조차 하지 못하는 청년이 하도 많아서 휴식이나 레저를 색안경으로 덧씌울 가능성이 높지만, 이 두 가지는 노동과 무관하게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누려야만 할 기본적 권리이다. 행복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하면서 휴식과 레저가 보장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헌법의 모순적 딜레마가 아닐까.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돈이 없어도 휴식과 레저를 충분하게 누릴 수 있는 조건을 국가와 사회가 만들면 된다. 노동과 무관하게 그 시간과 자유를 보장받아야만 할 삶의 요소가 되게 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휴식과 레저를 위해 돈과 시간이 자연스럽게 주어진다면, 어렵사리 누리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휴식과 레저를 즐길 수 있고, 노동도 건강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여길 수 있다면, 노동이 진짜 인간화되는 것 아니겠는가. 


노동이 즐거운 유토피아의 꿈


500년 이전에 저술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상소설의 방식을 빌어 당대 영국사회를 대신할 ‘을’들의 이상사회를 그렸다. 물론 짧은 생애 동안 손에 넣을 수 없는 욕망이나 정의라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토피아> 덕분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왕의 권력을 향해 권리를 내세우는 신민들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핵심 내용은 ‘노동’에 대한 요구였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려본다. 영국 수상까지 역임했던 토마스 모어는 1535년 7월에 참수되었는데, 아마도 당시 헨리(Henry) 8세가 통치하던 영국 사회를 신랄하게 그려낸 <유토피아>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토마스 모어가 꿈을 꾼 이상사회는 죽을 때까지 노동이 즐거운 사회이기도 하다. 그리스는 헌법에서 노동이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가난과 강탈은 사람들을 멍청하고 복종을 잘하게 만들며, 반란의 기운을 억눌러 버린다. 그래서 모두가 농사를 짓는 노동을 하고, 부는 소수에게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골고루 나누어야 한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전에 세 시간, 점심 두 시간, 오후 세 시간의 노동을 하고, 그 이외의 시간은 자유롭다.’ 토마스 모어 덕택에, 유럽에서는 유토피아를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면서도, 사회제도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한 세상’으로 이해한다. 노동이 즐거운 유토피아의 세상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꿈과 희망으로 그려내는 유토피아는 무궁무진하다. 단지 자본주의 사회가 이러한 세상을 꿈꾸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꿈꾸는 자유조차 없이 노동의 고통만을 삶의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 같다. 꿈을 되찾고 자유를 누리는 세상, 그 시작은 힘듦과 함께 즐거움이 있는 노동을 존중할 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