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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멕시코 국경장벽, 혹시 찬성하시나요? : 우리는 아리셀 참사에서 자유로운가?

공계진/시화노동정책연구소 이사장
금속노조연구원   |  

이미 우리나라에는 외국인이 살고 있지 않은 지역이 없다. 지자체 외국인 주민 현황 자료(2022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소위 외국인 노동자들은 175만 명으로 인구의 4.4%를 점하고 있다. 그중 경기도는 60만 명으로 인구의 5.5%를 점하고 있어서 경기도가 전국보다 조금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흥, 안산으로 좁히면 이 두 곳의 외국인 노동자 비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시흥의 경우 인구 대비 12.3%가 이미 외국인노동자들인데, 안산은 이보다도 2%가 넘는 14.2%에 달하고 있다. 그 결과 시흥시 정왕본동과 안산시 원곡본동의 인구구성이 역전되었다. 즉, 외국인이 내국인보다 많다. 벌써 몇 년 전이다. 원곡본동의 어느 마트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한국인을 본다는 말을 하면서. 필자가 사는 정왕동 중 정왕본동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시흥 거주 56,693명의 절대다수가 정왕본동의 원룸에 몰려 살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중국어를 비롯한 베트남어, 네팔어 등으로 쓰인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얼마 전 화성아리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리튬 배터리가 폭발하여 발생한 화재이지만 그 공장 내에 있던 23명의 노동자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중 17명이 시흥 거주자였는데, 이들 중 14명이 외국인노동자, 즉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시흥시가 정왕본동에 분향소를 설치했다고 해서 조문을 갔었는데, 분향소에는 이름도, 영정도 없었다. 시흥시 관계자에게 왜 이름과 영정조차 없느냐 했더니 정보공개의 문제 때문이라는 궁색한 설명을 했다. 결국 국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다 분향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얼토당토않은 시흥시 분향소를 보며 필자는 후회했다.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들이 제대로 된 분향소를 설치하고, 허망하고, 비참하게 돌아가신 노동자들을 추모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었던 자신을 자책했다. 화풀이는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 시흥안산지역지회 일반분회장에게 했다.

 

“노동자들이 23명이나 죽었고, 그중 시흥 거주자가 17명인데 노동조합이 나서지 않는 것은 문제다. 그 17명이 미조직노동자들이고, 그중 14명이 이주노동자들이라 그런 거 아니냐? 만약 조직노동자가 17명이고, 모두가 내국인이었다면 노동조합의 대응은 달랐을 것 아니냐?”

 

사실 열심히 시화공단을 일구고 있는 일반분회장에게 쏘아붙일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저 속이 상해 한 말이다. 하지만 금속노조, 민주노총에 속해 있는 조직노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우려스러운 현상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필자가 칼럼 제목을 ‘트럼프의 멕시코 국경장벽, 혹시 찬성하시나요?’라고 뽑은 이유가 있다. 필자는 지역의 금속노조 간부들과 얘기하면서 귀를 의심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필자의 귀에 꽂힌 얘기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저임금으로 일하며, 잔업을 가로채고, 3D업종의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서 자신들의 임금이 안 오르고, 고용이 불안정하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외국인 혐오 발언을 했다. 그리고 결론은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칼럼 제목에 ‘트럼프와 국경장벽’을 넣은 이유이다. 우리 노동자들이 외국인노동자들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으니, 우리도 트럼프가 멕시코국경에 장벽을 쳤듯이 항구와 공항마다 장벽을 치고 외국인노동자들의 유입을 막아야 하는가?

 

이주노동자가 국내 일자리를 잠식한다는 주장, 저임금으로 일함에 따라 작업장 노동조건 개선이 힘들다는 주장이 한국인 노동자들, 심지어 그중 조직노동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를 감소시킨다는 주장만큼이나 충분하면서도 객관적인 자료에 기반하지 않은 마타도어성 주장에 불과하다.

 

국내 이주노동자의 대부분은 정부의 엄격한 노동력 정책하에 수입된 노동력으로서 이주노동자가 열악한 노동조건 하에서 일하는 것은 저임금을 활용하고자 하는 자본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즉, 이주노동자의 존재로 인해 일자리를 잃거나 노동시장 조건 개선이 어렵다는 것은 원인이 아닌, 결과일 뿐이다. 시화노동정책연구소의 손정순 박사에 따르면, 일부 주변부 업종·직종 노동시장에서 하방 압력이 가중될 수는 있으나 해당 업종이나 직종은 대부분 3D 업무이기에 이미 한국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업종, 직종으로 노동시장 내 하방 압력은 미미하다. 그런데 현재의 저임금 구조를 이주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그들을 혐오하는 것은 같은 노동자 특히 조직노동자들이 할 말은 결코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유입을 막는 것은 답이 아니다. 올바른 것도 아니지만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을 혐오하거나, 배척하거나, 입국을 막는 것에 동의하거나, 실제로 그리 행동하기보다는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소위 win-win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과거 비정규노동자들을 대할 때 어떠했는가를 복기할 필요가 있다. 정규직 조직노동자들은 그들이 내 일자리, 내 임금을 뺏는다고 생각하며 함께 하기보다는 배척하고, 차별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비정규노동자들을 배척하고, 차별하기보다는 그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고, 함께 하려고 했다. 비정규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고, 정규/비정규노동자들이 함께 하기 시작하자 자본의 이간질과 장난은 많이 축소되었다. 비정규직을 이용해 정규직의 임금을 낮추고, 정규직의 고용을 불안하게 하는 행위가 대폭 축소되었다. 즉, 배척과 차별은 축소되었다.

 

이런 노동운동의 역사를 보며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조직노동자들의 관점과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와 임금을 뺏는다고 사고하며 자본과 정권에 놀아나는 대신 이주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고, 함께 자본과 정권에 대응해 나간다면 우리는 서로 갈궈 먹는 것이 아니라 win-win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화성아리셀 참사에서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했었다. 필자는 조직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갖지 못했고, 그래서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하지 못함으로 인해 화성아리셀 참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우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화성시청의 추모 집회에 참여하고서는 이제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금속노조 조합원, 공공노조 조합원 등 조직노동자들이 분향소를 지키고, 추모 집회에 참여하고, 투쟁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