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칼럼 > 칼럼
칼럼
 

노동자 정치, ‘국민’의 딜레마를 깨는 '민'의 진짜 정치를 배우자!

김영수/상지대학교
금속노조연구원   |  

8년 만이다. 2016년 가을과 겨울의 거리를 누볐던 ‘민’의 직접 정치가 2024년에 재현되었다. ‘민’이 2016년에 이끌었던 거리 정치의 목적은 간단했다. 권력자를 끌어내려 권력 체계를 바꾸는 것이었다. ‘이게 나라냐’ ‘박근혜는 하야하라’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하라’ ‘국민의 명령이다, 대통령은 자연인으로 돌아가라’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하야하라고 명령하는 ‘민’의 몸과 마음이 청계광장, 종로 일대, 광화문에 직접 정치의 민주주의로 피어났다. 2024년에도 ‘민’은 요구한다. ‘윤석렬 OUT! 윤석렬은 퇴진하라! 김건희 특검 수용하라! 거부권 정치는 이제 그만! 박근혜의 최순실, 윤석렬의 김건희! 국민의 생활을 내팽개친 대통령은 어느 나라 대통령인가! ’

 

박근혜 정권과 윤석렬 정권의 닮은 꼴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탁월한 정치적 판단 능력에 맡긴다. 그리고 야당들은 제도 권력의 틀 내에서 아주 다양한 시각으로 ‘민’의 직접 정치를 대한다. 필자는 제도권 야당의 당원이었던 적이 없어서 제도권 정치의 다양한 모습까지 말할 능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민’의 직접 정치에 틈나는 대로 가담하는 농업 노동자이기에 ‘민’의 광장 정치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자평한다. 2024년 ‘민’의 진짜 정치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이다.

 

광장 정치의 함성과 깃발은 참으로 형형색색이고 다양하며, 그 목적도 가지각색이다. 광장의 주체들도 그렇고, 직접 정치의 주체가 된 이유도 다양하다. 재미를 더했던 깃발의 이름만으로도, 자유발언에 참여하는 연령대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광장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하나더라도, 정치의 염원은 형태나 색깔에 있어서 ‘민’의 숫자만큼 다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민’의 다양성을 묶어 세우는 하나가 있다. ‘민’ 스스로가 통치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정치의 주체라는 점이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권력자들을 언제든지 해고할 권한이 ‘민’에게 있다는 원리와 가치를 다시 확인한다. 노랫말이 아니라 헌법 제1조 1항의 진짜 주인임을 확인하는 직접 정치의 장인 것이다. 의회 권력은 국민의 대표라고 하면서 행정 권력이나 사법 권력을 감시·견제한다. 행정 권력이나 사법 권력도 ‘국민을 위해, 국민의 눈높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 국민의 명령’ 등과 같은 ‘국민 만능시대’를 유도한다.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패러다임이 ‘국민’이라는 품 안에서 희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국가의 울타리 안에서 초국적 자본이나 독점 자본의 힘과 영향력을 국력으로 여기면서, 특정한 자본이 망할 경우 국가 전체가 위험 상태에 빠져 삶이 고통스러운 상태로 곤두박질칠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국민의 딜레마’ 상태다.

 

그런데 ‘국민 만능시대’가 맞느냐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다. ‘민’도 ‘국민’을 구성하는 한 주체이다 보니, 국민의 딜레마를 깨뜨리는 정치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권력을 무력하게 하는 ‘민’의 광장에 정치가 범람하는 순간만큼은 ‘민’이 ‘국민의 딜레마’를 깨는 시공간이자, 정치의 기원이 ‘민’의 권리에 있다는 원리를 다시 확인하는 시공간이 된다. 노동자 정치가 ‘민’의 광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준다. ‘민’ 스스로 권력을 만들어냈고 또 권력을 지배할 주인으로서 갖게 되는 자존감이 광장 정치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민’의 자존감은 직접 정치의 장에서 권력자들에게 명령하였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은 지금 바로 퇴진하라!’ ‘민’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음에도 따르지 않는다면, 대통령에 취임하고 2년 반 동안 25회나 거부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은 복종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죄까지 짊어져야 할 것이다. 권력자들은 ‘민’의 권리와 권한을 반드시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20%대에 머물러 있는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수행 능력을 더 바라보기 힘들다고 하면서,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대학생들도 시국선언의 행렬에 함께 참여하기 시작했다. ‘민’의 광장 정치가 비등점을 넘어섰다. ‘민’은 광장에서 제도권 야당 정치 세력에게 훈수하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2016년 촛불 정치를 이어받은 문재인 정권과 다수 의석의 여당이 ‘민’의 권리 정치를 형해화했던 사실을 제기하면서 제도권 야당들에게 훈수한다.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통령의 하야를 위해 촌각을 다투어도 모자랄 판인데, 거리 정치를 직접 조직하는 능력을 발휘해 보아라. 국민을 앞세워 진짜 서민과 노동자들을 우롱하지 말아라. 정치의 사법화를 불러일으키는 내로남불형 불법과 부정부패를 표적 수사로만 몰아가지 말고, 민의 정치대열에 무임승차해서 정치적으로 이용만 하려는 짓도 이제 그만하고, 선거 정치에만 골몰하면서 대의제를 민주주의의 최고라고 포장하지 말고, 대신 민의 권리를 진짜로 대의하는 정치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보여라!’

 

‘민’의 직접 정치는 ‘말과 입’의 정치에 머물지 않는다. ‘민’ 전체의 권리이자 요구라고 여기는 순간, ‘민의 정치’는 몸으로 실현되고 노동 현장의 다양한 투쟁으로 발현된다. ‘민’의 정치가 가지고 있는 ‘실천정치’가 그것이다.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권리가 짓밟힐 때, ‘민’은 투쟁으로 권력을 무력화하곤 했었다. 자신의 권리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정치가 그것이다. ‘민’이 말이나 글만으로도 권력을 통치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민’이 삶의 구석구석에서 실천정치의 장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삶 속에서 터득하고 체화한 지혜가 가르쳐 주고 있다. 말과 글은 실천과 하나가 되어야만 힘으로 바뀔 수 있다. ‘정치는 담론’이라고 여기는 것은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리다. 따로 따로만 추구하는 정치는 어느 한쪽을 대상화하거나 배제하려는 반쪽에 불과해서 하는 말이다. ‘민’의 직접 정치는 실천정치의 최고봉이다. ‘민’의 진짜 정치는 늘 권력보다 우위에 서 있는 권리의 정치를 직접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민의 권리가 권력을 지배하는 세상, 이것이 모든 정치의 희망이라고 한다면, 민의 직접 정치가 ‘모든 정치의 어머니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지배 세력은 역사적으로 권력과 정치에 대한 국가의 독점을 ‘문명화’의 조건으로 삼았다. ‘민’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정치적 삶을 야만으로 규정하는 대신, 일정한 틀로 표준화시키고 구속되는 국가의 정치를 근대와 문명으로 치환시켰다. 국가는 일상에 체화되어 있었던 정치와 권력을 ‘민’으로부터 떼어내서 특정한 세력만이 작동시키는 국가의 시스템으로 변화시켰다. 국가는 ‘민’에게 그러한 시스템을 작동시켜 ‘민’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면 그만이었다. ‘민’은 그 대가를 일상적으로 지불하고 있다. 국가는 이 과정에서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민’을 상대로 언제든지 억압하고 강요할 수 있는 시스템도 작동시킨다. ‘민’ 스스로 사적인 삶도 버거운데 공적인 삶까지 관여하기가 쉽지 않기에, 국가권력의 요구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자기통제에 익숙해졌다. 다른 말로 하면, 정치와 권력에 대한 자기검열이 습으로 체화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2016년과 2024년에 벌어진 ‘민’의 직접 정치를 누가 ‘닫힌 광장’이라고 하겠는가. 원론에 머무르는 말인 것 같지만, 끝없이 제기해야 할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민’이 ‘국민의 딜레마’에서 해방되고 권리의 형식적 주체가 아니라 실질적인 주체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유지해 나가야 할 요체다. 민주주의가 영원해야 하고, 그 끝 또한 제한되지 않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