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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공동화 - 다시 조직을 생각한다

금속노조연구원   |  

현장공동화-다시 조직을 생각한다


 
                                    김승호 정책연구원 자문위원장(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최근 완성차지부의 각 현장을 죽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정파 소속의 활동가와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조합원, 현장, 회사, 금속노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은 다른 의미에서 현장이 비고 있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현장공동화가 조합원의 무관심과 실리적 경향의 확대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전투적 활동의 침체였다면 이번에 느낀 현장공동화는 활동가들의 분할과 금속노조 전반의 고립화 현상, 즉 각 수준별 단위별로 연결되지 못한 채 분절되어 있으면서 마치 부러진 뼈마디 위에 살가죽만 걸친 형국이라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예로, 금속노조의 방침이나 유인물은 관성적으로 현장에 전달되고 있었다. 솔직히 조합원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여러 가지 내용들이 그냥 ‘뿌려지거나 전달되다’ 보니 금속노조는 헛된 짓만 한다는 인식이 커진다는 것이다. 현안을 중심으로 뿌려지는 제 현장조직들의 유인물도 여기에 한몫한다. 조합원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는 현안... 현안... 현안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구조와 조건이 존재하는 바, 솔직히 현장조직들도 금속노조 전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의례적인 수준 이상의 의미를 두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경우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현장조직별로 강조점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장조직들 사이의 통일된 입장을 제기하는 것도(설사 이런 내용들이 유인물에 실리더라도 이를 액면대로 믿는 조합원들도 이제는 별로 없다고 한다), 과거의 입장과 현재의 입장 사이에서 일관성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모두 따로국밥인 셈이다. 그나마도 너무 많이 먹어 물렸거나, 아니면 참 맛이 없어 보여 선뜻 숟가락이 가지 않는 그런 국밥 말이다. 이런 국면에서 금속노조 중앙과 현장의 간극은 멀다 못해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로 전환되고 만다. 현 금속노조 지도부와 소위 입장을 같이 하는 ‘조직’ 소속의 활동가들도 여느 활동가나 대의원과 다를 바 없이 현장의 현안에 묻혀 조합원의 눈치에 휘둘리거나 금속노조의 방침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가 된다. 이런 단절과 파편화 때문에 금속노조 전체적으로는 활동의 맥을 달리 하는 집행부를 통제하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맥을 같이 하는 집행부를 지원하기도 어려워 전체 전선에 힘을 실어 복무하도록 만들기도 어려워진다.


현장조직에 대한 비판의 주된 이유가 되고 있는 ‘권력을 향한’ 네트워크로서의 현장조직 자체는 사실 정당하고 비판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과정에서 조직을 분할하고 조직력을 약화시키는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현재 금속노조와 주요 대공장을 연결하는 구조를 살펴보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완성차 지부의 사정이 조금씩 다르고 또 그만큼씩 방침수행이나 금속노조에 대한 결합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는 것으로 하자. 우선 모 지부의 경우, 각 현장조직들은 현안에 대한 목소리는 지부 집행부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금속노조의 전체 사업이나 중요한 방침 등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조합원의 정서’, ‘조합원의 생각’들을 이유로 회피하거나 소극적이다. 아니면 대부분 활동가들조차 잘 모르고 있거나... 그런데 금속노조의 입장에서는 뭔가 논의하려면 지부 집행부를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지부 집행부에 대해 비판적인 제세력들을 통합하거나, 혹은 제세력들이 통합적으로 전체의 관점에서 뭔가를 하려는 의지도 찾아보기 힘들다. 차라리 조합원의 정서를 들어 금속노조의 방침이 잘못되었다거나 수정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 솔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지부의 경우 상대적으로 금속노조의 방침을 따르겠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고, 현장의 조직들도 겉으로는 원칙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지부 집행부로서는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운신의 폭은 무척 제한적이다. 각 조직들의 원칙론을 액면 그대로 믿는 조합원도 별로 없다는 것이 내부의 분위기인 것으로 전달되고 있지만, 액면과 실질가치의 사이에서 생기는 간극을 메워 넣는 책임은 고스란히 집행부에게 돌아갈 것이다. 각 조직들이 주장하는 이면의 내용을 집행부가 액면의 가치로 끄집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것은 집행부의 억측으로 치부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전술방침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한데, 금속노조 차원에서든, 지부 집행부 차원에서든, 현장조직 차원에서든 그 누구도 현실에 기반한 전술방침을 제기하거나, 그런 제기를 받아 논의의 장을 열어감에 있어서 책임을 공유하겠다는 배짱이나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냥 원칙론에 묻혀서 책임지지 않을 일만 골라서 한다. 조합원은 이 틈바구니에서 각 조직들의 이중적 태도를 본다. 그리고 금속노조든 지부든 집행부에게서는 현실에서 비껴난 방침을 본다. 이 과정이 누적되면서 서로 책임지지 않는 주장에 대한 묵계와 현재의 집행부가 잠재적 경쟁자의 지위에서 제외되는 즐거움의 공유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실리적 욕구를 채워줄 대리인으로 선택해 달라며 경쟁하는 조직들을 저울질한다.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 했다. 조직 내부의 경쟁이 민주주의를 촉진하고 조합원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정도가 지나쳤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 또한 동전의 뒷면처럼 동시적이라는 것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과거 민주화 과정에서 연합 혹은 담합을 통해 권력을 전복시켰던 경험은 이제 조합원을 상대로 재현될 필요가 있다. 경쟁을 저울질하며 자신들의 실익을 채우는데 너무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조합원들의 노회함을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쳇바퀴도는 비판과 오류반복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은 집행부를 장악한다고 되는 것도, 뒤에 물러서서 집행부를 비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아니 더 나아가 집행부만의 책임으로도, 특정 조직의 책임으로도 미뤄두어서는 안되는 시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조합원의 생각과 표에 표류하는 추수주의에 몸을 싣기만 할 것이 아니라면 제반 조직들의 ‘집합적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조직하기 위한 ‘과정’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이 관성적인 경험의 답습이어서는 곤란하다. 치열한 과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권력을 놓는 것이 필요한데, 권력장악을 위해 만든 조직들이 본질의 임무를 포기한다는 것은 역설일 수 있으나 어쩌랴 본질의 임무만을 강조하다 이 지경까지 온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