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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 활동가들은 잠을 충분히 자고 있는가?

금속노조연구원   |  
정일부 (한국노동운동연구소 부소장)


  노동조합운동이 어렵다는 말은 오래된 이야기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지금까지 큰 흐름을 만들어 왔던 산별노조 건설운동이 아직도 자리를 못 잡고 있다. 금속이 15만 조직으로 대공장까지 통합했지만 기업지부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지도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있으며, 공공도 최근 산별통합을 결의하였지만 기업별 전환결의가 힘차게 될 전망은 그리 녹록치 않은 현실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어렵사리 만들어왔던 진보정당 역시 민주노동당 분당사태로 많은 노동자들에게서 외면당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전임자임금이 이미 막히기 시작했고 내년엔 노조 상급단위의 교섭권한을 틀어막으려 하고 있다.
  이것은 산별노조와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자본의 계급적인 저항과 정치권력의 계속된 공격에 의한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은 20여 년간 자본과 정치권력의 탄압과 공세에 대응해왔지만, 밀리고 또 밀리면서 후퇴를 거듭하는 양상이다. 수십 년간의 변화의 한 가운데 금속이 서 있지만, 이러한 구조적인 위기상황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간부들은 이미 지쳐 있고 중간간부들은 아직 일머리를 잡지 못해 힘겨워하고 있다. 대부분의 현직간부들이 눈앞에 있는 일을 나름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 일의 전망도, 전략도 갖지 못한 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디서 희망을 만들 수 있을까? 금속노조의 전망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며, 이 사회에 사는 한 계급대립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다들 어렵다고 하는 상황 속에서도 쌍용자동차 같은 위력적인 점거투쟁이 일어났고, 기륭과 동희에서 확인했듯이 노동계급의 끈질긴 투쟁으로 승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 사회의 본질이 만들어내는 계급적 대립과 그 투쟁은 결코 사그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비정규직 투쟁이 써가고 있는 새 역사의 징후들 역시 노동계급의 투쟁이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된 지는 오래이며, 이제 서서히 전선의 중앙으로 옮겨가는 양상으로 변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에서 보이듯이, 그 투쟁 규모와 상관없이 지역과 전국의 관심을 받고 있지 않은가?
  이와 함께, 청년들의 노동운동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양상도 더욱 뚜렷해지고 있고 그 운동방식도 빠르고 넓게 변하고 있다. 청년들의 움직임은 청년유니온 한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특징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비스업은 물론이고 제조업까지도 간접고용이 횡행하고 있으며 정규직조차도 중심층과 주변층으로 분류되어, 인간대접을 받는 노동자는 극소수로 축소되어가고 있다. 청년 노동자들은 이런 상황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또 주변을 둘러봐도 비슷한 처지의 친지·동료가 많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년 노동자들의 경우 이메일·블로그와 트위터·페이스북 등 IT 기술을 생활화함으로써 운동을 더욱 빠르고 훨씬 넓게 만들어 가고 있다. 운동문화조차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규모는 문제가 아니다. 깊은 산속에서는 작은 비에도 계곡물이 삽시간에 넘쳐흐르는 것처럼, 작은 투쟁들이 엄청난 물결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속도다. 87년 이후 지금까지 노동조합운동을 앞장서 하고 있는 간부·활동가와 그 조직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새 역사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게 문제다. 따라잡을 상태가 안 된다면 최소한, 자신의 축적된 경험과 자산을, 이후의 노동조합운동을 위해 쏟아부으려고 의식적으로 준비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새 역사를 위한 전환은, 그것을 위한 준비는 사실 그다지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하나는, 개개인이 자신의 결의로 가입하는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이다. ‘금속은 하나다’라는 식으로 통으로 묶어가는 사고와 사업방식에 더 이상 의존할 일이 아니다. 노자간 계급대립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 금속 같은 조건에서는 투쟁에 항상 바쁘지만, 그런 식의 사업방식으로 하는 투쟁들이 과연 치열한 운동일까? 조직의 규모, 투쟁의 규모는 작더라도 그 속의 노동자들 의지 하나하나가 당찰 때 무서울 게 무엇이며, 그 투쟁이 위력을 발휘할 것은 이후 사태를 예상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 아닌가?
  다른 하나는, 현장의 문제가 바로 지역의 문제임을, 거꾸로 지역사회의 문제가 바로 현장의 문제임을 실천하는 운동을 중심에 놓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업장단협을 넘어서는 쟁점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곧 지역사회의 문제임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좀 어렵게 말하면 노동계급이 나서서 계급동맹을 만들어가는 일이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 세력으로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노동조합을 다시 우리 사회의 희망으로 자리매김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결의로 생활 속에서 투쟁하는 움직임은 이미 우리 주변에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산자와 죽은자를 찢어놓은 정리해고에 맞서 협동체 방식으로 극복해온 포항의 진방철강 지회, 사업장별 교섭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처음부터 지역교섭을 염두에 두고 조직해온 공공노조 의료연대 서울지역지부, 기업지부를 지역지부로 다시 지역연합 노조로 만들어가는 공공서비스노조 산하 서경지부 등 ... 또 노동운동이 잘 나가는 유럽보다, 조합활동이 어려운 미국·일본에서 오히려 우리 같은 사례들이 확인되고 있다. 미국 SEIU의 ‘청소부에게 정의를’ 운동, 일본의 각종 지역유니온 운동들이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남는 문제는 ‘어떻게 집중할 것이냐’이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공부하는 시간이 많다고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은 잠을 충분히 자야 하고, 그런 건강한 상태에서 얼마나 열의를 갖고 집중하느냐가 관건이다.